▣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64- 적자생존과 내로남불

영광도서 0 609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적자생존’을 이렇게 말한 이, 누군지 몰라도 많은 이들이 이 말을 듣고는 노트에 적는다. 많은 이들이 ‘맞는 말이야’라며, 말장난임에도 불구하고 공감한다. 이런 말이 소위 히트를 치면서 정체불명의 많은 말들이 신조어로 탄생한다. 내로남불도 그런 예인데, 마치 말장난이 아닌 실제 단어처럼 받아들인다. 이런 말을 남긴 이들은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로 같은 곳에서 강의를 하더라도 나보다 훨씬 많은 강사료를 받는다. 그들은 재치가 있고 나는 재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나에게 적자생존을 말하려면 나는 고작 ‘적자생존, 진화의 과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적자생존이다. 모든 만물의 터전인 자연은 그 요인이 무엇이건 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자연은 만물의 총칭이자 만물의 환경인데, 만물의 삶의 투쟁으로 변한다. 이러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필멸하고 적응하는 생물만 생존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정도로 설명을 한 다음 ‘만물은 이처럼 유전한다. 더디건 빠르건 만물 특히 생물은 시간의 흐르면 변하는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지 못하면 종말을 고한다. 대지 가이아가 탄생한 이래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종족보존을 못하고 사라졌던가? 좁혀서 인간만 들여다봐도 얼마나 많은 민족이, 직업이, 관습이, 제도가 사라졌던가!’ 정도로 설명을 마칠 것이기 때문이다.

 

아! 내 머리, 아니 내 재치의 한계여!

 

진지함보다 재치가 필요한 시대에 나는 제대로 재치를 갖추지 못하고 지낸다. 진지함에서 재치로, 무거움보다 가벼움으로, 운명에서 우연으로, 모든 것이 지속적인 것보다는 찰나적으로 변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서 나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이들을 질투한다. 1회에 기백만 원, 기천만 원을 받는 강사들과 나를 비교하며 시기한다. 그들은 적어도 말재주가 있거나 줄을 잘 서는 능력이 있다. 지금 이 시대는 느림보다 삘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도 적자생존의 적용을 받는다면, 당연히 나는 적자생존에서 부적응자에 해당하는 셈이다.

 

시간이 흐르건 무엇이 변하건 둘 중에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발전하거나 퇴보하거나 필멸한다. 인간이 갓난애에서 시작하여 아동이 되고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중년을 거쳐 노년, 그리고 죽음을 맞듯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면, 다른 말로 변하지 못하면 그는 미진아이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로 낙인 찍힌다.

 

신화나 전설은 이를 상징적으로 설명한다. 소위 그리스신화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부자간의 싸움에서 수렵의 신의 상징을 가진 우라노스는 농경의 신을 상징하는 크로노스의 낫에 생산능력을 가진 것을 잘림 당하고 신화의 주류에서 밀려난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신화는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쫓겨나는 자와 쫓아내는 자로 설정한다. 이는 자연의 순리이지만 전 우주적인 흐름으로 보면 적자생존이다.

 

이를 문화적으로 보면 수렵시대를 이어 목축의 시대가 오고, 목축의 시대에 이어 농경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여기에 비추면 카인과 아벨의 성서 이야기도 상징적으로 풀면 이에 다름 아니다. 아벨은 목축업, 카인은 농업을 상징한다면, 결국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이를테면 생산을 중단시키고 카인이 그 다음을 잇는다. 성경은 카인은 그 죄로 신의 질책을 듣긴 하지만 대신에 어디에서든 카인을 해코지 못하도록 하는 증표를 주어 보호한다고 기록한다.

 

적자생존, 흐르는 시간만큼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변화에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다. 지금도 시간은 흐른다. 흐름에 편승하여 재치 있게 변하지 않으면 생존의 터전을 잃는다. 적자생존이란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이론의 한 축이지만, 이처럼 시간을 먹고 사는 모든 존재들에겐 적용 가능한 말이다.

 

‘그러니까 나도 변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나 변하는 건 아니더라. 다만 너도 나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류에 따라 변하는 자는 좋은 대우를 받으나 그렇지 못한 너나 나는 이 모양이니까. 적자생존의 한 방편이 내로남불이니,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살아남기는 해야겠고, 내로남불은 잘 안 되니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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