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5- 홍천찰옥수수의 전설

영광도서 0 511

시간은 흐른다. 우리 기억 속에 그윽한 풍경화 같은 추억을 남기고 흐른다. 모든 것은 변하고 다시 볼 수 없는 풍경들, 그때 그 사람들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엔 여전히 그림처럼, 사진처럼 남는다. 물론 그 그림들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사라지면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사진이나 그림처럼 되고 말 테지만,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알게 모르게 농촌도 변했다. 우선 우리 동네엔 백우산 바로 아래서부터 이어졌는데, 그곳은 사유지가 아니라 국유지였다. 60년대쯤 국토재건단이란 청년들이 들어와 백우산 바로 아래를 개간했다. 경사진 산이었지만 계단식으로 뱉을 만들고 토지가 없는 이들을 이주시켰다. 그런 혜택을 입은 집이 백우산 아래로 세 집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집들이 집을 비우고 이사를 갔다. 집는 폐가가 되어 쓰려졌고 그곳의 토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계단식은 그대로 남은 산이 되었다.

 

일시적으로 토지 없는 이들을 위해 실시했던 화전 및 계단식 밭을 폐지하는 정책이 새로 시작된 듯싶었다. 그 영향이었던지 백우산 아래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직접 산림감시원 몰래 한밤중에 불을 놓아 일궜던 산속 화전도 더 이상 경작을 할 수 없었다. 짐작컨대 국유지 단속을 시작한 듯싶었다. 그러면서 산 아래 집들은 비면서 농촌 인구도 자연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의 호수도 줄었다.

 

이런 외적인 변화도 변화려니와 경작의 형식도 달라졌다. 우선 그건 우연한 변화였다. 여전히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다. 우리 마을 어느 밭이든 옥수수는 잘 자랐기 때문이었다. 옥수수 농사가 덜 되는 조금은 습한 곳엔 감자를 심었고, 콩이나 팥과 같은 작물은 물 빠짐이 좋고 양지가 발라야 했으므로 많이 짓지는 않았다. 그런 패턴은 여전했다. 어느 순간 옥수수 농사가 변화를 이끌었다. 이전까지는 옥수수 수확은 많았고 옥수수는 주식으로 쓰고 남은 것은 정부에서 구입해줬다. 그래 봐야 큰돈이 되지는 않았다.

 

옥수수 농사는 수확이나 수입보다 자라는 걸 보면 흐뭇하였다. 자리는 속도가 빠른데다 자라서 밭을 덮을 즈음이면 마치 도열한 군인들의 모습처럼 웅장했다. 그 위로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솨아아아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들을 만했고, 그때의 풍경은 일대장관이었다. 좀 더 지나서 옥수수들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아이를 업은 것처럼 보였고, 이렇게 아기를 업은 듯한 옥수수들이 거의 일정한 크기로 자란 밭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고 아름다웠다. 좀 더 지나면 옥수수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바람 불면 날리는 꽃가루들의 향연도 아름다웠다. 그러한 과정을 모두 거친 후 옥수수 이삭이 완전히 익은 가을에야 수확을 했다.

 

그랬는데 외부에서 옥수수 장사가 들어왔다. 옥수수가 한창 익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풋옥수수로 팔라는 것이었다. 가을에 수확하기 전, 풋옥수수로 삶아 먹을 수 있을 때 100토새기 단위인 한 접 당 가격을 제시했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가을에 옥수수로 파는 것보다 훨씬 수익이 높았다. 그 장사의 설득에 넘어간 마을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여 그 해부터 옥수수를 가을까지 가다려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한여름에 풋옥수수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돈이 귀할 시기인 여름에 풋풋한 돈을 만질 수 있어서, 그것도 목돈을 만질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풋옥수수로 팔기로 했으나 그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작업을 대신해주면 당시 농촌의 품삯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그때부터 옥수수는 이제는 가을의 수확을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풋옥수수로 팔기 위한 작물로 바뀌었다. 옥수수 농사는 이렇게 의도하지 못한 변화를 제일 먼저 맞이했다. 전에 보다 제번 돈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해부터는 옥수수 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집도 전보다 돈이 덜 귀하게 되었다.

 

그렇게 팔려나간 풋옥수수들은 홍천찰옥수수라는 명예를 얻었을 터였다. 그런데 실상 그 옥수수들은 찰옥수가 아니었다. 그냥 대대로 이어온 토종 옥수수였을 뿐이다. 옥수수는 꽃을 피우면 바람에 엄청 멀리 날린다. 이렇게 날아간 옥수수꽃들은 다른 옥수수에 영향을 미처 다른 종들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뫼옥수수 밭 옆에 따로 찰옥수수를 심은 들, 다음해에는 금방 변종을 시켜 뫼옥수수와 찰옥수수가 교차한 종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우리가 먹을 찰옥수수는 외딴 밭에 따로 심는다. 그래야 닮지 않고 그대로 찰진 옥수수를 유지한다. 일반 옥수수보다 이삭도 작고 알도 잘다. 그런데 삶아 먹으면 찰져서 뫼옥수수 맛에 비할 수 없다. 소출이 적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찰 옥수수는 먹을 만큼만 따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니 실제는 홍천찰옥수수라고 알려진 풋옥수수들은 찰옥수수가 아니라 토종 옥수수이다.

 

풋옥수수로 팔기 위해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면서 옥수수는 가을이 되기 전에 제 역할을 다 마친 셈이었다. 그러고 나면 자식을 잃은 엄마처럼 옥수수들은 푸름을 유지하지 못하고 메말라서 가을이 되기 전에 갈색으로 변했고 이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한생을 마감했다. 다만 선택 받지 못했던 이삭을 지닌 옥수수들만 가을까지 푸름을 유지했다.

 

때문에 전에는 겨울밤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아버지가 송곳으로 옥수수 이삭의 줄을 내고 우리는 옥수수 알을 따던 겨울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보다 편하게 겨울밤을 보낼 수 있었다. 돈이 돌기 시작한 농촌의 변화는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가 줄을 서고 있었다.

 

이전 삶은 기억에서도 지워지기 시작했고, 모든 것은 당연한 변화, 변화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한 듯 살았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옛이야기처럼 기억한다. 아마도 지금 그 마을에 살아갈 사람들도 추억하지 못하는 그 이야기들, 이젠 다시 복원되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풍경들일 뿐이다. 지금은 그곳에 간들 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도 만날 수 없을 테다. 그때 그 시절이 괴로웠던 행복했던 다시는 복원할 수 없기에 지난 일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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