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3- 약재 채취하여 돈 벌기

영광도서 0 579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어디 의지할 데도 없고, 특별한 제주가 없다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무기는 그저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살려면 남보다 느려도 한참 느리고, 남을 도저히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면 그것밖에 도리가 없지 않는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기, 비록 늦어도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란 교훈, 나에게 그걸 손수 가르친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산골에선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큰돈은 아니지만 푼돈은 얼마든 벌 수 있었다. 그 돈이면 저축은 못해도 굶지 않고 살 수는 있었다. 물론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하면 곧바로 농사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크게 돈이 들어갈 데가 없기도 했다. 그래도 세상은 바뀌어 나 초등학교 절업 이후 2-3년 지나면서는 중학교 진학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내 동생 역시 중학교에 진학시켰다. 친구들이 중학교에 가니까 가고 싶어 하는 듯해서 내가 나서서 중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입학 기간이 지났지만 중학교를 방문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입학 시킬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나름 돈은 더 들었다. 작은형도 서울로 취직하러 떠난 후라 일을 할 수 있는 가족은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뿐이었다. 늘 일하기를 즐긴다고 해야 할까, 늘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일 년 내내 거의 쉬지 않으셨다.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무슨 일이든 했다. 시골에서 돈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의 품을 파는 것이었지만, 모 심는 일 말고는 일이 없었다. 김을 매거나 보통 농사일은 서로 품앗이를 했기 때문에 품을 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틈나는 대로 약초를 캐는 일에 나섰다.

 

늦가을이나 이른 봄엔 오가피나무를 채취했다. 오가피나무는 뿌리를 값을 더 쳐주었고, 나뭇가지도 뿌리보다는 싸지만 값을 쳐줬다. 채취한 오가피나무는 잘 말려서 오일장에 나가서 약재 수집상에게 팔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오가피나무를 찾아야 했는데 나 살던 마을엔 오가피나무가 흔했다. 어가피나무 하나면 제법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었다. 포기로 이루어진 오가피나무는 오래된 나무는 밑둥 크기는 팔뚝만큼 굵었다. 그런 나무 한 폭을 파서 뿌리는 뿌리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따로 말려서 팔았다.

 

뿌리는 굵은 것은 도끼로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말리면 되었고, 나무는 너무 굵은 것은 약재상에서 받지 않았다. 나무 전체가 약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껍질이 붙어 있어야 했다. 때문에 굵은 나무는 도끼로 쪼개면서 껍질이 붙은 부분은 쓰고 속은 버렸다. 손가락 굵기 만한 나뭇가지들은 작두로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마당 한가득 널어 말렸다. 그렇게 잘 말려 바삭거리는 정도로 말려서 큰 자루에 담아 오일장에 지게로 지고 나가서 팔았다. 뿌리가 더 비싸고 나무부분은 좀 쌌다는 것은 알겠으나 팔아서 쓰는 것은 아버지 몫이었기에 나는 몰랐다. 다만 나는 아버지를 도와 약초 채취를 했을 뿐이었다. 오가피나무는 농한기에 돈을 벌게 해주는, 뿌리부터 하나 버릴 것 없는 고마운 약재였다.

 

봄이 되면 농삿일이 바쁠 때를 제외하고 틈만 나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약재 채취를 나섰다. 아버지와 내가 주로 채취한 것은 삽주와 둥굴레였다. 물론 보너스로 더덕을 채취할 수도 있었다. 가장 처리하기 쉽고 판매하기 쉬운 것은 더덕이긴 했으나 더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더덕은 어쩌다 걸리면 캐는 것이었고 삽주와 둥굴레는 무척 많았다. 다래끼를 일단 허리에 차고, 여벌로 큰 자루를 준비해 다녔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약재를 채취하면 큰 자루에 가득 채취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굵은 칡을 끊어서 질빵을 걸어 짊어지고 집으로 왔다.

 

삽주는 마당에 널어 말리면 되었다. 어느 정도 말리면 삽주는 흙이 잘 털렸기 때문에 다루기 쉬웠다. 반면 둥굴레는 그냥 그대로 말려서 말 수 없었다. 큰 가마솥에 삶아서 말려야 했다. 둥굴레는 처음은 흰색이지만 삶아서 말리면 황색으로 변했다. 하루라도 빨리 말려 장에 가서 돈을 바꿔 오려면 삶아서 부뚜막에 널어 말리면 빨리 말랐다. 양이 많으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말렸다. 둥굴레는 처음엔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것도 말리면 새끼손가락보다 가늘었다. 가늘게 마른 둥굴레를 꺾었을 때 딱 꺾여야 약재상에서 퇴자를 맞지 않았다.

 

그렇게 수집해서 준비한 약재들을 아버지와 나는 지게에 짊어지고 오일장에 나가서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렇다고 내 몫의 돈은 없었다. 가족공동의 돈이었다. 시골에서 굳이 돈을 쓸 일도 많지 않아서 꼭 필요할 때만 엄마한테 돈을 타면 되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책을 살 곳도 없었다. 통신으로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일 년에 한두 권 구입하는 게 끝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돈벌이를 열심히 했지만 그걸로 족했다. 성실하고 부모님 말씀 거역하지 않는 나는 그런 대로 착한 아들이었다. 제일 오래 부모님 곁을 지킨 아들이었다. 어쩌면 세상에 변화에 적응할 줄 모르는 순진한 아들이었다.

 

남의 땅을 소작하는, 도조를 내고 소작하는 것에서 벗어나 내 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조금 과장해서 밤낮으로 일하셨던 아버지, 성실하고 부지런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아버지, 밥하고 고추장만 싸서 산을 누비다가 쌈거리는 산에서 채취하여 점심을 함께 먹었던 아버지, 항상 광목으로 된 옷만 입으셨던 아버지, 검정고무신만 신으셨던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한 날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남았다.

 

지난 일은 모두 아프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다. 색 바랜 흑백사진 같지만 애잔한 추억으로 남는다. 하얀 광목 바지와 윗옷을 입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문득 그립다.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던, 꾸짖을 줄 모르셨던 마냥 착하시기만 하고 과묵하셨던 아버지, 가끔 잘 따라오는지 돌아볼 것만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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