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4- 우리 집을 마련하기

영광도서 0 510

장상 높이 895미터 백우산, 백우산 산자락이나 계곡 곳곳에는 나물이 많이 나왔다. 물론 철에 E라 버섯도 많이 나왔다. 때문에 이른 봄이면 아버지를 따라 나서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나물 채취에 나섰다. 어느 계곡에 가면 참나물이 있는지, 어디에는 고사가 나는지, 어디에는 고비가 나는지, 어디에 더덕이 많이 나는지, 대략 훤히 알았다.

 

나물을 뜯어 오면 삶아서 말린 다음 타원형 다발로 만들어 짚이나 싸리나무 껍질로 얼레를 엮어 보관했다가 집에서 먹거나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나 묵나물은 그다지 값이 나가지 않아서 거의 집에서 식용으로 썼다.

 

그중에 돈이 되는 건 고사리와 고비였다. 해서 봄이면 아버지와 나는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고사리와 고비를 채취했다.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고 고비를 꺾어 집에 올 때는 큰 자루 가득 담긴 고사리와 고비를 산에서 칡을 끊어 질빵을 걸어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흐뭇이 많은 고사리와 고비는 양이 엄청 났다. 돈이 되기에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꺾어 온 고사리와 고비는 일단 큰 가마솥에 삶는다. 고사리와 고비를 구분해서 삶는데 고사리는 그냥 꺾어온 대로 삶아서 그냥 말리면 되지만 고비는 삶은 다음에 대궁만 빼고 옆에 난 이파리들을 훑어 버려야 한다. 이렇게 깔끔하게 훑은 다음 말려야 한다. 이 단계가 끝나면 마당에 커다란 멍석이나 비닐을 깔고 그 위에 널어 말린다. 충분히 말라 부서질 정도로 잘 마르면 짚으로 타원형 덩이로 만들어 보관한다. 그렇게 잘 말린 고사리와 고비는 오일장에 가면 묵나물보다는 더 값을 쳐서 받는다.

 

봄이면 고사리와 고비 그리고 묵나물을 채취하여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시골에서 그다지 돈을 쓸 일은 많지 않았다. 물론 나물을 뜯어 돈을 만든 들 큰돈은 되지 않았다. 가장 쉽게 벌려면 정부에서 시행하는 나무 심기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나 남의 품을 팔아 즉석에서 돈을 받는 게 제일 간단하고 나물 채취보다 더 돈이 되었다. 나물 채취는 손도 많이 갔고 절차도 복잡했던데 비해 이런 일들은 간단하니 좋았다.

 

물론 봄이면 나무 심기에 동원되는 인력들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반장이 뽑아서 보냈다. 그럴 때는 엄마와 함께 식목하러 가곤 했다. 그게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운이 좋으면 꽤 여러 날 식목에 동원될 수 있었다. 조림사업이었는데 주로 낙엽송을 많이 심었다. 그러면 위와 아래에서 줄을 잡아서 줄을 넘기는 사람 둘이 필요했다. 그렇게 쳐진 줄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주로 아줌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섰다. 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가 있어서 그 표시 하나에 한 사람씩 서 있다가 그 지점에 나무를 심으면 되었다. 중간 중간 묘목을 배분하는 사람이 그 자리마다에 묘목을 두었고 줄지어 선 사람들은 자기 위치에 묘목을 심었다.

 

그 다음해에는 주로 남자들만 일꾼으로 모집했다. 전해에 심어 놓은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중간에 자란 잡풀들을 낫으로 제거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남자들만 일꾼으로 뽑혔다. 그렇게 뽑히면 다행으로 여겨 힘든 줄 모르고 일에 나섰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 할 수만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최대한 나섰다. 덕분에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엔 드디어 소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백우산 산자락, 위쪽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이사를 갔으므로 막치미 집을 사기로 했다, 땅은 1750평, 그 중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집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 집이 이사를 가면서 그다지 비싸게 부르지 않아 그 토지를 샀다.

 

드디어 오랜만에 우리 집이라고 마련했으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을 그대로 살 수는 없었다. 새로 집을 짓기 위해 한 해는 더 남의 집 살이를 해야 했다. 여름에 미리 산림간수 몰래 집을 짓는데 필요한 기둥이며 서까래 감을 잘라서 숲에 숨겨두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검어져야 산림간수가 와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준비를 마쳐 놓고 가을에 집을 지으려고 집을 쓰러뜨리려니 쉽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이 막상 부수려니 잘 넘어가지 않아 기둥에 밧줄을 매고 동네사람들이 모여 밧줄을 당겨 집을 무너뜨렸다.

 

목수 한 분은 필요했다. 해서 목수 한 분에게 집을 지을 것을 맡기고 나머지 조력은 나와 아버지가 맡았다. 동네 인심은 너무 좋았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하루씩 돌아가면서 집을 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큰 돈 들이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새로 집을 짓고 그 다음해에 드디어 우리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집 한 채 마련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이었지만 무일푼으로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들이 집이나 농토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백우산 바로 아래에 집을 마련하고 제일 높은 곳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살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셨던 아버지, 잠시라도 쉴 새 없이 농사일을 하고 나물채취를 하고 바쁘고 힘겹게 사시면서도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산에 오르면 항상 앞장서서 길을 헤치셨던 아버지, 새로 집을 지으면서도 그저 과묵하게 좋은 듯한 표정마저 짓지 않으셨던 늘 점잖았던 아버지, 전통적인 아버지의 전형이셨던 아버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다시는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없는 아버지, 이제는 편히 쉬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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