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80회 - " 인간의 대지 - 기다림의 시간의 의미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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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30 21:58
메르모즈가 조종사가 된 지 12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다시 한 번 남대서양을 횡단하던 중에 그는 후방 우측의 엔진을 끄겠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남겼는데, 그 이후로 침묵이 이어졌다.
이 소식은 처음에는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10분을 넘어가자,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모든 항로의 무선전신국들이 불안감에 가슴을 졸였다. 10분 늦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우편 비행에 있어서 10분이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이 10분이라는 죽은 시간의 한가운데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건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사건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다. 운명은 그의 판결을 선고했으며, 이 판결에 대해서는 이제 상소란 없다. 요컨대 강철 같은 손이 비행기를 물 위에 가볍게 착륙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산산이 부서지도록 조종한다. 하지만 그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통보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깨어져가는 희망들과 죽을병처럼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는 이 침묵을 우리 모두는 겪어야 했다. 우리는 그 동료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개척한 그 남대서양 위의 하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메르모즈는 결국, 추수를 끝낸 뒤 자신의 경작지에 누워 자는 농사꾼처럼 자신이 개척한 하늘길에 숨어 있는 것이다.
동료의 이런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그가 자신의 직업적 임무를 다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기에 다른 죽음보다 조금이나마 위안을 하게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기항지를 바꾸어 스스로 멀리 떠났다. 하지만 우리가 빵을 늘 아쉬워하는 것만큼 메르모즈의 부재가 아직은 사무치게 아쉽지는 않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중에서
시간, 우리는 시간 속에 살아간다.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살러왔다. 그리고는 떠난다. 살러오는 전조는 미리 예감되어 있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예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모든 권한은 신만이 갖고 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분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라며 산다. 위험한 소명을 맡고 떠난 사람이 막상 돌아올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으면 1초 1초가 엄청나게 촉박함을 가져다준다.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10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을 걸고 비행하는 이가 시간 내에 연락이 없으면 이미 산 사람이 아니니, 시간이란 누구냐에 따라, 어떤 환경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렇게 옆에 있던 사람들, 친한 친구, 또는 연인 등을 이승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면 그때 우리는 한동안 삶의 열병을 앓게 된다. 나와 친분의 정도에 따라 그 병은 더한 중병으로 나를 후벼 파는 것이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보내고도 우리는 또 다시 그를 잊은척하며 일터로 돌아가 빵을 얻는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이미 떠난 사람을 애석하게 생각할 자유는 있지만 그를 원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살아있음을 인정하는 빵을 만드는 일이다.
* 생명의 애착은 우리 삶의 모든 희노애락을 넘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최복현-
이 소식은 처음에는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10분을 넘어가자,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모든 항로의 무선전신국들이 불안감에 가슴을 졸였다. 10분 늦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우편 비행에 있어서 10분이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이 10분이라는 죽은 시간의 한가운데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건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사건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다. 운명은 그의 판결을 선고했으며, 이 판결에 대해서는 이제 상소란 없다. 요컨대 강철 같은 손이 비행기를 물 위에 가볍게 착륙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산산이 부서지도록 조종한다. 하지만 그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통보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깨어져가는 희망들과 죽을병처럼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는 이 침묵을 우리 모두는 겪어야 했다. 우리는 그 동료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개척한 그 남대서양 위의 하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메르모즈는 결국, 추수를 끝낸 뒤 자신의 경작지에 누워 자는 농사꾼처럼 자신이 개척한 하늘길에 숨어 있는 것이다.
동료의 이런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그가 자신의 직업적 임무를 다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기에 다른 죽음보다 조금이나마 위안을 하게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기항지를 바꾸어 스스로 멀리 떠났다. 하지만 우리가 빵을 늘 아쉬워하는 것만큼 메르모즈의 부재가 아직은 사무치게 아쉽지는 않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중에서
시간, 우리는 시간 속에 살아간다.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살러왔다. 그리고는 떠난다. 살러오는 전조는 미리 예감되어 있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예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모든 권한은 신만이 갖고 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분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라며 산다. 위험한 소명을 맡고 떠난 사람이 막상 돌아올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으면 1초 1초가 엄청나게 촉박함을 가져다준다.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10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을 걸고 비행하는 이가 시간 내에 연락이 없으면 이미 산 사람이 아니니, 시간이란 누구냐에 따라, 어떤 환경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렇게 옆에 있던 사람들, 친한 친구, 또는 연인 등을 이승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면 그때 우리는 한동안 삶의 열병을 앓게 된다. 나와 친분의 정도에 따라 그 병은 더한 중병으로 나를 후벼 파는 것이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보내고도 우리는 또 다시 그를 잊은척하며 일터로 돌아가 빵을 얻는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이미 떠난 사람을 애석하게 생각할 자유는 있지만 그를 원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살아있음을 인정하는 빵을 만드는 일이다.
* 생명의 애착은 우리 삶의 모든 희노애락을 넘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최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