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김윤환
(주)영광도서 대표이사 | 경영학 박사
yhkim@ykbook.com
[약력] 경남 함안 대산 구혜 출생(194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졸업, 부산외국어대학교 경영학석사, 부산대학교 국제학석사, 동아대학교대학원 경영학박사. ‘87 JCI부산시지구 회장, '88한국청년회의소중앙부회장, '89부산시체육회이사, 한국청년회의소 연수원 교수부장, (사)목요학술회 부회장, '06국제신문 부사장, 부산고등법원민사 조정위원, 부산문화재단 이사, (사)한국마케팅관리학회 부회장, 2014부산ITU전권회의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2014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부산광역시 새마을회 회장, 부산새마을신문 발행·편집인 등 역임...< 더보기 >

*제73회 - " 엄마생각 "

영광도서 0 496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 형 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고된 삶을 살아가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남아 빈방을 지키던 어린 자식의 외로움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왔던 우리 세대는 금방이라도 덥석 잡히는 풍경이다.

기형도는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며 주목받는 시인이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서른 살,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어머니’는 영원히 아름다운 호칭이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이름 또한 어머니다. 영화, 드라마, 연극, 소설 등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시대의 트랜드가 된 느낌이다. 한 때의 선풍이 아니라 아무리 불러도 목마른 이름이 어머니다.

한국 어머니의 대표 주자는 신사임당이다. 새로 나온 5만원권 초상에 채택되었다. 아들 율곡의 초상은 1천원권에 실려 있다. 모자가 동시에 화폐에 실린 희귀한 경우다. 그만큼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남편에게도 훌륭한 반려자였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 공에게 출가했다. 일찍부터 아버지 신 진사에게 교육을 받은 사임당이라 이미 처녀 때는 학문과 예술이 상당한 위치에 도달했다. 남편 이 공은 모든 점에 있어서 부인만 못했다. 사임당은 불만스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결혼한 이상 그는 남편을 받들고 아내의 도리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는 남편에게 공부를 더 하기를 권했다.

부인보다 3년 위인 남편 이원수 공은, 비록 자기 아내요, 나이도 3년이 아래지만 학문과 재예와 연격이 자기보다 월등하게 높기 때문에 언제나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인은 어느 날, 이 공과 마주앉아 서로 헤어져서 10 년 동안 학문을 닦은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부디 가서 아무 생각 말고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해 크게 성공해서 오십시오.”
서릿발 같은 권고의 말을 듣고 이 공은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처가인 오죽헌에서 20리 되는 성산까지 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서 되돌아가 부인으로 하여금 놀라게 했다. 다시 둘째 날이었다. 이 공은 대관령 밑 가맛골까지 겨우 30리를 왔다가 도로 돌아갔다. 3일 만에는 대관령 아래 반쟁이까지 40리를 왔다가 되돌아갔다.
“대장부가 뜻을 세우고 10년을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난 것인데, 이같이 사흘을 잇따라 되돌아온다면 당신이 장차 무슨 인물 노릇을 하겠습니까?”
사임당은 간장이 무너지는 듯이 아픔을 느꼈다. 이 공은 그 말에 대답하되,
“학업도 학업이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을 떠나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따로 있을 수가 없소. 한 시각도 떨어질 수가 없는 데 어찌하겠소.”
사임당은 남편의 나약한 성격과, 학문에 큰 취미를 못 느끼는 것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까 하고 생각한 끝에 마침내는 위협적인 전술을 썼다. 그래서 그는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꺼내 이 공 앞에 놓고, 심각한 목소리로,
“만일 당신이 이같이 나약하고 무능력한 남자로 그친다면, 나는 세상에서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오래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어 산으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가장 불측한 태도이지만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이 공은 눈이 번쩍 떠졌다.
“부인 참으시오. 내 생각이 얕았소. 이 밤이 새면 나는 기꺼이 떠날 것이오. 당신을 실망 시키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그 날 밤이 지나서는 부인과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후 이 공은 1550년, 명종5년에 수운판관 벼슬에 올랐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혹시 약한 어머니, 약한 아내가 되지 않길 당부한다. 용맹스런 장수 밑에 약한 병사 없고 강한 어머니 밑에 나약한 자식 없다. 강하게 키운 자식은 효자가 되지만 응석받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응석만 부린다. 다 큰 응석받이를 캥거루족이라고 한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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