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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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제75회 - " 가 정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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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2016.12.01 03:45
가 정
- 박목월
지상에는 / 아홉 켤레의 신발. /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은 행복의 최소단위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고전적 경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정의 소중함은 영원한 가치이다. 세태가 변해서 가정의 기둥이 모호해졌다. ‘가장=아버지’라는 등식마저 흐릿하다. 가족 구성원들이 개별화, 파편화되고 가장에 대한 의존도가 약화되었다.
가족은 분리, 해체가 자유로운 결합체가 아니다. 사랑과 신뢰로 응결된 단일 물체다. 전근대적 가부장제도는 마땅히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마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하모니를 이루며 꾸려지는 교향곡이 가정이다. 체력과 완력이 경제력과 권위로 통하던 시대는 갔다. 그런 시대의 아버지도 사라졌다. 많은 가정에서 쳐진 어깨와 고개 숙인 남자가 아버지다. 불황, 해고, 실직은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었다.
더러는 아버지의 책무를 팽개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산맥이 되고 방패가 되고 지붕이 되고자 노력한다. 가족을 위해서는 장수가 되고자 한다. 사나운 불길에 뛰어들어 가족을 구할 용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큰소리 뻥뻥 치지는 못해도 아버지는 크고 위대하다.
이 시는 힘겨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돌아온 시인이 아버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허약한 시인 아버지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 현실적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생활시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비의 경제적 무능은 자신의 능력 부재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시인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가난은 필연적이며, 그것의 행동적 극복보다는 가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아버지는 강하다. 아버지는 위대하다. 아버지에 대한 존중과 권위부여가 필요하다. 가족들이 나서서 아버지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자. 쳐진 어깨를 펴고 장수처럼 우뚝 설 수 있게 힘을 부어주자. 왜곡된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하지만 늠름한 권위는 필요하다. 아버지가 강해야 가정이 강해지고 국가가 강해진다.
시인이 토로한 허약한 고백 속에 숨겨진 옹골찬 용맹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홉 켤레 신발을 모두 간추리고 건사하며 격랑을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읽어야 한다. 비록 겸허와 허약함을 독백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내심은 한없이 굵고 단단하다. 요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빠를 부탁해’라는 외침도 필요한 듯하다. 시인은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버지라는 믿음직한 것이 존재한다’는 역설임을 우리는 안다. (*)
- 박목월
지상에는 / 아홉 켤레의 신발. /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은 행복의 최소단위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고전적 경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정의 소중함은 영원한 가치이다. 세태가 변해서 가정의 기둥이 모호해졌다. ‘가장=아버지’라는 등식마저 흐릿하다. 가족 구성원들이 개별화, 파편화되고 가장에 대한 의존도가 약화되었다.
가족은 분리, 해체가 자유로운 결합체가 아니다. 사랑과 신뢰로 응결된 단일 물체다. 전근대적 가부장제도는 마땅히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마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하모니를 이루며 꾸려지는 교향곡이 가정이다. 체력과 완력이 경제력과 권위로 통하던 시대는 갔다. 그런 시대의 아버지도 사라졌다. 많은 가정에서 쳐진 어깨와 고개 숙인 남자가 아버지다. 불황, 해고, 실직은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었다.
더러는 아버지의 책무를 팽개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산맥이 되고 방패가 되고 지붕이 되고자 노력한다. 가족을 위해서는 장수가 되고자 한다. 사나운 불길에 뛰어들어 가족을 구할 용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큰소리 뻥뻥 치지는 못해도 아버지는 크고 위대하다.
이 시는 힘겨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돌아온 시인이 아버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 허약한 시인 아버지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 현실적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생활시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비의 경제적 무능은 자신의 능력 부재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시인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가난은 필연적이며, 그것의 행동적 극복보다는 가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아버지는 강하다. 아버지는 위대하다. 아버지에 대한 존중과 권위부여가 필요하다. 가족들이 나서서 아버지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자. 쳐진 어깨를 펴고 장수처럼 우뚝 설 수 있게 힘을 부어주자. 왜곡된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하지만 늠름한 권위는 필요하다. 아버지가 강해야 가정이 강해지고 국가가 강해진다.
시인이 토로한 허약한 고백 속에 숨겨진 옹골찬 용맹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홉 켤레 신발을 모두 간추리고 건사하며 격랑을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읽어야 한다. 비록 겸허와 허약함을 독백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내심은 한없이 굵고 단단하다. 요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빠를 부탁해’라는 외침도 필요한 듯하다. 시인은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버지라는 믿음직한 것이 존재한다’는 역설임을 우리는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