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학자, 닫힌 교문 앞에 서다
작지만 큰 이야기, 나의 시대 나의 기록
이 책은 저자가 덕성여대에서 해직된 1997년부터 박원국 덕성여대 이사장의 연임이 좌절된 2001년까지 5년 동안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기간에 덕성여대에는 교육부 특별감사 두 차례,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네 차례, 관선이사가 세 차례 파견되었다. 또한 직무대행을 포함해 이사장이 일곱 명, 총장이 다섯 명 교체되었다. 덕성학원 이사장 임기가 5년인 점을 감안할 때, 직무대행을 제외하고 이사장이 다섯 번 교체된 5년의 기간은 평화로운 시기의 25년에 해당한다. 그만큼 덕성 민주화 운동은 치열했다. 65일간의 전교생 수업거부, 260일간의 총장실 점거를 포함하여 2,555명의 전국 지식인 서명 및 기자회견, 재단 항의방문, 성금모금, 가두시위 등 질풍과 노도처럼 일어났던 이 싸움은 1999년 한상권 교수의 복직과 2001년 박원국 이사장의 퇴진이라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한상권 교수의 부당한 재임용탈락으로 촉발된 이 사건은 불합리한 교수재임용 제도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었고, 대학이라는 공공재를 사유화하여 전횡을 일삼았던 사학재단에 대한 거부운동이었다. 이 한가운데 이 책의 저자인 한상권 교수가 있었다.
부당한 재임용탈락을 철회하기 위해 싸우던 한상권 교수는 ‘학교가 조용해질 때까지 일 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한 복직제의를 거절했다.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복직되느냐가 학원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내외의 학생, 지식인, 여러 단체들의 연대를 통해 한상권 교수의 복직투쟁은 교수들의 교수권과 학생들의 수업권, 직원들의 노동권을 요구하는 전면적인 권리투쟁으로 승화되었다. 이 책은 힘없는 개인들이 연대와 단결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몸짓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개인의 복직 및 교수 재임용제의 개선, 구재단의 퇴진, 인사행정과 학사행정의 민주화 등에서 끈질기게 불의에 저항한 모든 사람들의 승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싸움은 덕성학원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기억투쟁이었다. 덕성학원의 뿌리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에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재단이 주장해온 ‘설립자의 권리’가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기억투쟁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상권 교수는 2008년 ‘차미리사평전’을 펴내고 ‘차미리사 가치’와 ‘송금선 가치’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덕성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청산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을 해냈을 때 ‘역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된다. 그렇게 기록된 한 시대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역사학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록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록을 분석하고 종합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해낸 경우는 무척 드물다. 이 책은 개인인 한상권 교수가 부당한 압력과 불의에 대항하며 만든 ‘역사’를, 기록자인 한상권 교수가 정리한 다섯 권의 ‘투쟁백서’를 자료로 하여, 역사학자인 한상권 교수가 분석하고 종합한 우리 시대 역사의 한 단편이다. 한상권 교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는 치열하고,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자로서는 부지런하며, 그 기록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철저하였다. 자신이 한가운데 있었던 덕성민주화 투쟁을 다루면서도, “역사가는 사실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기록에 근거하고 정확히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관적 인식인 ‘서술된 역사’가 객관적 존재인 ‘본래의 역사’와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다.”라는 실증주의 역사학자 랑케의 말을 통해 학자적인 냉정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올곧은 세상을 염원했던 수많은 영혼의 희생을 ‘기억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낮지만 굵은 목소리로 일깨워준다.
2010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상지대의 운영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구재단 측에서 추천한 정이사 4인을 승인했다. 같은 달 교과부가 사분위의 의결 내용을 최종 승인하면서 17년 만에 구재단이 상지대에 복귀했다. 조선대, 세종대에 이어 세 번째 구재단 복귀 결정이었다. 지난 9월로 임시이사 임기가 만료된 덕성여대도 사분위의 결정을 앞두고 있다. 구재단 측은 전 이사장과 그 가족들을 포함한 이사진 복귀 안을 교과부에 제출해 놓은 상태이다. 5년에 걸친 치열한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덕성학원에서 구재단이 물러난 것이 2001년. 덕성여대 구성원들은 10년 만에 다시 차가운 거리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학자, 나의 시대를 기록하다 “상식의 회복을 위한 기억의 투쟁” -저자 인터뷰
학내 갈등의 원인과 싸움의 성격은?
덕성민주화운동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권리투쟁’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기억투쟁’,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해직된 후 ‘동토의 왕국’이라 불리던 덕성에서 기본권을 되찾으려는 ‘권리투쟁’이 일어났다. 사회의 공기(公器)인 대학을 사유물로 여긴 이사장의 그릇된 교육관 때문에 일어난 저항이었다. 재단 이사장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립학교법이 그의 일탈된 행동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낮은 급여와 열악한 근무조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당한 해직, 비싼 등록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낙후된 교육시설, 무분별한 학부제 시행 등 암울한 교육환경에 맞서 교수, 직원 그리고 학생은 빼앗긴 교육권ㆍ학습권ㆍ노동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박원국 이사장은 자신을 ‘교주(校主)’, 즉 학교의 주인이라고 일컬었다. 학교가 자신의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할 목적”으로 제정된 사립학교법에는 설립자의 소유 관념이 없다. 교육은 공공재(公共財)이기 때문이다. 덕성민주화운동은 대학을 사유물로 볼 것인가, 공공재로 볼 것인가라는 가치관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은 그 지배질서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 체계나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억투쟁’은 중요하다. 덕성학원은 모자 세습에서 형제 세습으로, 형제 세습에서 다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족벌 세습재단이었다. 게다가 덕성학원 설립자라고 일컬어지는 송금선은 친일파, 즉 반민족행위자였다. 덕성학원은 단순한 족벌 재단이 아니라 친일 족벌 재단이었던 것이다. 덕성인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 끝에 덕성학원 설립자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결과 덕성여대는 친일 족벌 사학의 오명을 벗고 정통 민족 사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차미리사 가치’와 ‘송금선 가치’ 사이의 대립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간의 반세기가 넘는 긴 싸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덕성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청산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법치국가에서 해직의 부당함을 법에 호소하지 않고 사회적인 형태로 저항한 까닭은?
나는 복직을 법에 호소하지 않았다. 사립학교법이 “교원을 기간을 정하여 임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을 뿐, 재임용의 의무나 절차, 요건 등을 법령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임용의 기준과 절차에 관한 근거가 실정법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교원의 지위가 법률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임용 관련 법규가 없으니, 재임용탈락 시비를 둘러싼 재판이 성립될 리 없었다. 재임용탈락자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재임용 여부는 사법부의 심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되었다(법원이 적법 여부를 심리하고 물리치는 ‘기각’과는 달리, 각하는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부당한 재임용탈락처분을 철회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저항을 통해 ‘대법원 판례’를 넘어서는 새로운 판례, 즉 ‘덕성여대 판례’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자신의 ‘소극성을 자책하는 깊은 수치심’이 원동력이었다.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것처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의로운 행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羞惡之心 義之端也). 일반 학생들은 ‘나는 약하다. 평범하다. 그러나 나는 약한 대로 평범한 대로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상식에 배치되는 힘 앞에 굴하지 않겠다.’라는 학생들의 의지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의대회에 50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서 1000명 이상이 모이곤 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름 없이 행동하는 학생들이 모여 거대한 ‘사회적 힘’을 형성한 것이다.
다음은 ‘연대의 힘’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연대하여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교직원과 학생, 학내 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졸업생과 재학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사회 각계의 원로인사를 비롯해 수많은 민주세력이 덕성사태를 보고 연민의 시선을 넘어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들은 기자회견, 서명운동, 성명서 발표, 항의·지지방문, 집회 시위, 성금모금, 항의농성, 공개 강연, 신문 칼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덕성민주화운동을 도와주었다. ‘한국역사연구회’,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 ‘학술단체협의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교육·사회·시민 단체들은 ‘덕성여대 한상권교수 재임용탈락처분 철회 및 교수재임용제 개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덕성민주화운동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제는 잊혀진 덕성에서의 일을 새삼 기록하여 펴낸 까닭은?
학내 구성원과 사회 민주세력이 연대해 부당한 재임용탈락처분을 뒤집은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덕성민주화운동이 해직교수들 사이에서 복직투쟁의 전범(典範)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가 복직된 뒤, 제주산업정보대, 세종대, 서울대, 동의대 등 여러 대학에서 부당하게 해직되었던 교수들이 복직되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에 있었던 덕성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덕성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에 던진, ‘대학의 자유정신’, ‘법치주의’, ‘교육의 공익성’, ‘친일잔재 청산’, ‘국가권력의 공공성’, ‘공동선의 추구’ 등에 관한 문제제기와 의미는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더없이 소중하다. 역사적 기억은 대중이 공유할 때 현실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올해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여성해방을 꿈꾸며 덕성학원을 세운지 90주년이 된다. 지난날 덕성에서 있었던 정의를 향한 몸부림이 ‘사회적 기억’이 되어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기록의 객관성과 정확성은?
역사가는 사료를 분석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종합하는 작업을 통하여 단편적인 사료들을 일관되게 연결한다. 이 책을 쓰는 데 바탕이 된 자료는 덕성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간한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철회 투쟁백서』(5권), 1999년 창립 이후 매년 발간한 교수협의회 활동백서, 2002년 발간한 『덕성여자대학교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등이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뽑아낸 후, 자료에 입각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가치가 개입하기 때문에, 서술한 내용이 객관적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란 역사가의 현재적 관점과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과거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성립하는 담론체계다.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의 말처럼 역사가는 ‘사실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기(wie ist es eigentlich gewesen sei)’ 위해 기록에 근거해 정확히 서술하려고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주관적 인식인 ‘서술된 역사’가 객관적 존재인 ‘본래의 역사’와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옛 서독대통령 바이체커((Richard von Weizsacker: 1920∼)가 1985년에 종전 40주년을 맞이하여 서독 연방의회 본회의장에서 행한 연설문 중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과거는 나중에 바뀌어 지는 것도 아니요, 또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없습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성에 감염될 소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과거 그릇된 세력의 편에 서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진실한 반성과 참회를 할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은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도록 망각하고 용서하는 일이 아니다. 결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책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는?
우리가 오늘을 올바로 살기 위해 올곧은 세상을 염원하는 수많은 순수한 영혼의 희생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민중의 의지를 발굴하는 작업은, 세상일에 대해 앞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그들과는 달리 자기들의 의분(義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또 그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의지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말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자. 저절로 좋아지는 세상은 없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10여 년 전 질풍과 노도처럼 일었던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 덕성여대는 정(正)이사체제로의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덕성처럼 과거 분규를 겪었던 사학의 이사진을 선임하거나 해임할 권한을 가진 기구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기구인 사분위는 2009년 9월 10일 전체회의에서 “종전이사에게 법인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과반수)의 이사 추천권을 부여한다.”라는 원칙을 확정지었다. 학교를 자신들의 사유물로 취급해왔고 각종 비리로 쫓겨났던 구 재단에게 소유권을 돌려주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이에 고무되어, 덕성학원 구 재단도 교육부와 사분위에 정 이사 명단을 제출하고 호시탐탐 복귀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분위원들의 그릇된 교육관에 의거한 잘못된 결정으로 대학의 공익성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임시이사 파견대학이 다시 분규에 휘말려 들고 있다. 지난 2월 사분위의 결정에 의해, 대학 민주화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조선대와 세종대에 구 재단이 버젓이 복귀하였다. 상지대의 경우도 8월 9일 교육비리 전과자 김문기씨 지지 세력의 상지학원복귀를 허용하였다. 비리재단 복귀는 이들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덕성여대를 비롯하여 대구대, 동덕여대, 광운대 등 비리재단으로 고통받았던 대학의 구성원들도 비리·비민주 재단의 대학 장악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구 비리 재단이 속속 복귀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교육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덕성사람들의 몸부림을 기록한 이 책이 교육민주화의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 싸우고 있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 민주세력들에게 승리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길 바란다. 또한 마산 창신대 해직 교수들을 비롯하여 부당하게 해직되어 어렵게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교수들에게도 복직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작가 소개
저자 한상권
1953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양심수후원회 운영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인간의 권리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역사 속에서 기층민들의 권리의식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하여,『조선후기 사회문제와 소원訴?제도─상언上言·격쟁擊錚연구』(일조각)로 1998년 월봉저작상을 수상하였다.
덕성학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징계를 받고 해직되었으나 전국 대학 교수들의 복직촉구 서명과 덕성 구성원들의 복직운동에 힘입어 2년 만에 복직되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1991년의 징계와 1997년의 해직은 덕성학원의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해직을 계기로 덕성여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덕성학원이 독립운동가 차미리사가 세운 민족사학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관련 사료를 모아, 2008년『차미리사평전-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푸른역사)를 집필하였다.
▣ 주요 목차
머리말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1 어버이날 받은 편지
2 새 교수님 필요 없다. 한 교수님을 돌려 달라!
3 나는 멋대로, 너는 법대로
4 조祖교수, 부父교수
5 월봉저작상 받은 ‘좌익교수’
6 추적60분
7 땅에서 넘어진 사람,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8 감히 이사장님의 이름을 거명하다니
9 주인과 머슴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10 그 어떤 시기도 덕성에서 보낸 7개월 만큼 길고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11 하늘이 통곡할 일이에요
12 이제 저는 떳떳한 F학점을 받겠습니다
13 재임용탈락 교수의 ‘장외 수업’
14 “한상권 교수 복직”
15 애타는 강단 복귀, 뒷거래는 사절
16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17 기억을 둘러싼 투쟁
18 구속영장이 청구됐습니다
19 물러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
20 올해의 인물, 덕성 사람들
글을 마치며
덕성여자대학교 민주화운동일지(1986~2001)
역사학자, 닫힌 교문 앞에 서다
작지만 큰 이야기, 나의 시대 나의 기록
이 책은 저자가 덕성여대에서 해직된 1997년부터 박원국 덕성여대 이사장의 연임이 좌절된 2001년까지 5년 동안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기간에 덕성여대에는 교육부 특별감사 두 차례,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네 차례, 관선이사가 세 차례 파견되었다. 또한 직무대행을 포함해 이사장이 일곱 명, 총장이 다섯 명 교체되었다. 덕성학원 이사장 임기가 5년인 점을 감안할 때, 직무대행을 제외하고 이사장이 다섯 번 교체된 5년의 기간은 평화로운 시기의 25년에 해당한다. 그만큼 덕성 민주화 운동은 치열했다. 65일간의 전교생 수업거부, 260일간의 총장실 점거를 포함하여 2,555명의 전국 지식인 서명 및 기자회견, 재단 항의방문, 성금모금, 가두시위 등 질풍과 노도처럼 일어났던 이 싸움은 1999년 한상권 교수의 복직과 2001년 박원국 이사장의 퇴진이라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한상권 교수의 부당한 재임용탈락으로 촉발된 이 사건은 불합리한 교수재임용 제도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었고, 대학이라는 공공재를 사유화하여 전횡을 일삼았던 사학재단에 대한 거부운동이었다. 이 한가운데 이 책의 저자인 한상권 교수가 있었다.
부당한 재임용탈락을 철회하기 위해 싸우던 한상권 교수는 ‘학교가 조용해질 때까지 일 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한 복직제의를 거절했다.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복직되느냐가 학원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내외의 학생, 지식인, 여러 단체들의 연대를 통해 한상권 교수의 복직투쟁은 교수들의 교수권과 학생들의 수업권, 직원들의 노동권을 요구하는 전면적인 권리투쟁으로 승화되었다. 이 책은 힘없는 개인들이 연대와 단결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몸짓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개인의 복직 및 교수 재임용제의 개선, 구재단의 퇴진, 인사행정과 학사행정의 민주화 등에서 끈질기게 불의에 저항한 모든 사람들의 승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싸움은 덕성학원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기억투쟁이었다. 덕성학원의 뿌리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에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재단이 주장해온 ‘설립자의 권리’가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기억투쟁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상권 교수는 2008년 ‘차미리사평전’을 펴내고 ‘차미리사 가치’와 ‘송금선 가치’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덕성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청산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을 해냈을 때 ‘역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된다. 그렇게 기록된 한 시대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역사학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록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록을 분석하고 종합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해낸 경우는 무척 드물다. 이 책은 개인인 한상권 교수가 부당한 압력과 불의에 대항하며 만든 ‘역사’를, 기록자인 한상권 교수가 정리한 다섯 권의 ‘투쟁백서’를 자료로 하여, 역사학자인 한상권 교수가 분석하고 종합한 우리 시대 역사의 한 단편이다. 한상권 교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는 치열하고,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자로서는 부지런하며, 그 기록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철저하였다. 자신이 한가운데 있었던 덕성민주화 투쟁을 다루면서도, “역사가는 사실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기록에 근거하고 정확히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관적 인식인 ‘서술된 역사’가 객관적 존재인 ‘본래의 역사’와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다.”라는 실증주의 역사학자 랑케의 말을 통해 학자적인 냉정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올곧은 세상을 염원했던 수많은 영혼의 희생을 ‘기억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낮지만 굵은 목소리로 일깨워준다.
2010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상지대의 운영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구재단 측에서 추천한 정이사 4인을 승인했다. 같은 달 교과부가 사분위의 의결 내용을 최종 승인하면서 17년 만에 구재단이 상지대에 복귀했다. 조선대, 세종대에 이어 세 번째 구재단 복귀 결정이었다. 지난 9월로 임시이사 임기가 만료된 덕성여대도 사분위의 결정을 앞두고 있다. 구재단 측은 전 이사장과 그 가족들을 포함한 이사진 복귀 안을 교과부에 제출해 놓은 상태이다. 5년에 걸친 치열한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덕성학원에서 구재단이 물러난 것이 2001년. 덕성여대 구성원들은 10년 만에 다시 차가운 거리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학자, 나의 시대를 기록하다 “상식의 회복을 위한 기억의 투쟁” -저자 인터뷰
학내 갈등의 원인과 싸움의 성격은?
덕성민주화운동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권리투쟁’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기억투쟁’,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해직된 후 ‘동토의 왕국’이라 불리던 덕성에서 기본권을 되찾으려는 ‘권리투쟁’이 일어났다. 사회의 공기(公器)인 대학을 사유물로 여긴 이사장의 그릇된 교육관 때문에 일어난 저항이었다. 재단 이사장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립학교법이 그의 일탈된 행동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낮은 급여와 열악한 근무조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당한 해직, 비싼 등록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낙후된 교육시설, 무분별한 학부제 시행 등 암울한 교육환경에 맞서 교수, 직원 그리고 학생은 빼앗긴 교육권ㆍ학습권ㆍ노동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박원국 이사장은 자신을 ‘교주(校主)’, 즉 학교의 주인이라고 일컬었다. 학교가 자신의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할 목적”으로 제정된 사립학교법에는 설립자의 소유 관념이 없다. 교육은 공공재(公共財)이기 때문이다. 덕성민주화운동은 대학을 사유물로 볼 것인가, 공공재로 볼 것인가라는 가치관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은 그 지배질서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 체계나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억투쟁’은 중요하다. 덕성학원은 모자 세습에서 형제 세습으로, 형제 세습에서 다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족벌 세습재단이었다. 게다가 덕성학원 설립자라고 일컬어지는 송금선은 친일파, 즉 반민족행위자였다. 덕성학원은 단순한 족벌 재단이 아니라 친일 족벌 재단이었던 것이다. 덕성인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 끝에 덕성학원 설립자가 친일파 송금선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결과 덕성여대는 친일 족벌 사학의 오명을 벗고 정통 민족 사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차미리사 가치’와 ‘송금선 가치’ 사이의 대립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간의 반세기가 넘는 긴 싸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덕성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청산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법치국가에서 해직의 부당함을 법에 호소하지 않고 사회적인 형태로 저항한 까닭은?
나는 복직을 법에 호소하지 않았다. 사립학교법이 “교원을 기간을 정하여 임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을 뿐, 재임용의 의무나 절차, 요건 등을 법령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임용의 기준과 절차에 관한 근거가 실정법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교원의 지위가 법률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임용 관련 법규가 없으니, 재임용탈락 시비를 둘러싼 재판이 성립될 리 없었다. 재임용탈락자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재임용 여부는 사법부의 심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되었다(법원이 적법 여부를 심리하고 물리치는 ‘기각’과는 달리, 각하는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부당한 재임용탈락처분을 철회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저항을 통해 ‘대법원 판례’를 넘어서는 새로운 판례, 즉 ‘덕성여대 판례’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자신의 ‘소극성을 자책하는 깊은 수치심’이 원동력이었다. 맹자가 일찍이 설파한 것처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의로운 행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羞惡之心 義之端也). 일반 학생들은 ‘나는 약하다. 평범하다. 그러나 나는 약한 대로 평범한 대로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상식에 배치되는 힘 앞에 굴하지 않겠다.’라는 학생들의 의지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의대회에 50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서 1000명 이상이 모이곤 하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름 없이 행동하는 학생들이 모여 거대한 ‘사회적 힘’을 형성한 것이다.
다음은 ‘연대의 힘’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연대하여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는 교직원과 학생, 학내 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졸업생과 재학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사회 각계의 원로인사를 비롯해 수많은 민주세력이 덕성사태를 보고 연민의 시선을 넘어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들은 기자회견, 서명운동, 성명서 발표, 항의·지지방문, 집회 시위, 성금모금, 항의농성, 공개 강연, 신문 칼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덕성민주화운동을 도와주었다. ‘한국역사연구회’,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연합회’, ‘학술단체협의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교육·사회·시민 단체들은 ‘덕성여대 한상권교수 재임용탈락처분 철회 및 교수재임용제 개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덕성민주화운동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제는 잊혀진 덕성에서의 일을 새삼 기록하여 펴낸 까닭은?
학내 구성원과 사회 민주세력이 연대해 부당한 재임용탈락처분을 뒤집은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덕성민주화운동이 해직교수들 사이에서 복직투쟁의 전범(典範)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가 복직된 뒤, 제주산업정보대, 세종대, 서울대, 동의대 등 여러 대학에서 부당하게 해직되었던 교수들이 복직되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에 있었던 덕성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덕성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에 던진, ‘대학의 자유정신’, ‘법치주의’, ‘교육의 공익성’, ‘친일잔재 청산’, ‘국가권력의 공공성’, ‘공동선의 추구’ 등에 관한 문제제기와 의미는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더없이 소중하다. 역사적 기억은 대중이 공유할 때 현실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올해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여성해방을 꿈꾸며 덕성학원을 세운지 90주년이 된다. 지난날 덕성에서 있었던 정의를 향한 몸부림이 ‘사회적 기억’이 되어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기록의 객관성과 정확성은?
역사가는 사료를 분석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종합하는 작업을 통하여 단편적인 사료들을 일관되게 연결한다. 이 책을 쓰는 데 바탕이 된 자료는 덕성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간한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처분철회 투쟁백서』(5권), 1999년 창립 이후 매년 발간한 교수협의회 활동백서, 2002년 발간한 『덕성여자대학교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등이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뽑아낸 후, 자료에 입각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가치가 개입하기 때문에, 서술한 내용이 객관적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란 역사가의 현재적 관점과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과거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성립하는 담론체계다.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의 말처럼 역사가는 ‘사실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기(wie ist es eigentlich gewesen sei)’ 위해 기록에 근거해 정확히 서술하려고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주관적 인식인 ‘서술된 역사’가 객관적 존재인 ‘본래의 역사’와 완전히 부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옛 서독대통령 바이체커((Richard von Weizsacker: 1920∼)가 1985년에 종전 40주년을 맞이하여 서독 연방의회 본회의장에서 행한 연설문 중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과거는 나중에 바뀌어 지는 것도 아니요, 또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없습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성에 감염될 소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과거 그릇된 세력의 편에 서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진실한 반성과 참회를 할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은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도록 망각하고 용서하는 일이 아니다. 결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책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는?
우리가 오늘을 올바로 살기 위해 올곧은 세상을 염원하는 수많은 순수한 영혼의 희생을 ‘기억할 의무’가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민중의 의지를 발굴하는 작업은, 세상일에 대해 앞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그들과는 달리 자기들의 의분(義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또 그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의지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말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우물물을 마시기 전에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자. 저절로 좋아지는 세상은 없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10여 년 전 질풍과 노도처럼 일었던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 덕성여대는 정(正)이사체제로의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덕성처럼 과거 분규를 겪었던 사학의 이사진을 선임하거나 해임할 권한을 가진 기구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기구인 사분위는 2009년 9월 10일 전체회의에서 “종전이사에게 법인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과반수)의 이사 추천권을 부여한다.”라는 원칙을 확정지었다. 학교를 자신들의 사유물로 취급해왔고 각종 비리로 쫓겨났던 구 재단에게 소유권을 돌려주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이에 고무되어, 덕성학원 구 재단도 교육부와 사분위에 정 이사 명단을 제출하고 호시탐탐 복귀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분위원들의 그릇된 교육관에 의거한 잘못된 결정으로 대학의 공익성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임시이사 파견대학이 다시 분규에 휘말려 들고 있다. 지난 2월 사분위의 결정에 의해, 대학 민주화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조선대와 세종대에 구 재단이 버젓이 복귀하였다. 상지대의 경우도 8월 9일 교육비리 전과자 김문기씨 지지 세력의 상지학원복귀를 허용하였다. 비리재단 복귀는 이들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덕성여대를 비롯하여 대구대, 동덕여대, 광운대 등 비리재단으로 고통받았던 대학의 구성원들도 비리·비민주 재단의 대학 장악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구 비리 재단이 속속 복귀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교육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덕성사람들의 몸부림을 기록한 이 책이 교육민주화의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 싸우고 있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 민주세력들에게 승리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길 바란다. 또한 마산 창신대 해직 교수들을 비롯하여 부당하게 해직되어 어렵게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교수들에게도 복직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작가 소개
저자 한상권
1953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양심수후원회 운영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인간의 권리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역사 속에서 기층민들의 권리의식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하여,『조선후기 사회문제와 소원訴?제도─상언上言·격쟁擊錚연구』(일조각)로 1998년 월봉저작상을 수상하였다.
덕성학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징계를 받고 해직되었으나 전국 대학 교수들의 복직촉구 서명과 덕성 구성원들의 복직운동에 힘입어 2년 만에 복직되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1991년의 징계와 1997년의 해직은 덕성학원의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해직을 계기로 덕성여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덕성학원이 독립운동가 차미리사가 세운 민족사학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관련 사료를 모아, 2008년『차미리사평전-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푸른역사)를 집필하였다.
▣ 주요 목차
머리말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1 어버이날 받은 편지
2 새 교수님 필요 없다. 한 교수님을 돌려 달라!
3 나는 멋대로, 너는 법대로
4 조祖교수, 부父교수
5 월봉저작상 받은 ‘좌익교수’
6 추적60분
7 땅에서 넘어진 사람,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8 감히 이사장님의 이름을 거명하다니
9 주인과 머슴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10 그 어떤 시기도 덕성에서 보낸 7개월 만큼 길고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11 하늘이 통곡할 일이에요
12 이제 저는 떳떳한 F학점을 받겠습니다
13 재임용탈락 교수의 ‘장외 수업’
14 “한상권 교수 복직”
15 애타는 강단 복귀, 뒷거래는 사절
16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17 기억을 둘러싼 투쟁
18 구속영장이 청구됐습니다
19 물러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
20 올해의 인물, 덕성 사람들
글을 마치며
덕성여자대학교 민주화운동일지(1986~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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