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새로운 세계사’의 패러다임
역사학자 레프틴 스타브리아노스는 1958년 세계사가 “진정으로 새로운 지구적 관점”을 가진 역사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윌리엄 맥닐은 1976년 “젊은이들에게 국가의 틀을 넘어선 진정한 세계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은 1982년 세계사학회의 발족으로 이어졌고 1990년에는 학술지『저널 오브 월드 히스토리』가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도 2002년 역사학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미국의 세계사학회와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성과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사를 지향하는 시도는 더욱 확산되었다. 지난해에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공동연구를 통해 새로운 세계사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기도 했다[『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2009)].
한편으로는 국내에 ‘새로운 세계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history) 또는 ‘빅 히스토리’(Big Hhistory) 같은 용어가 ‘지구사’ ‘거대사’ ‘거시사’로 제각각 번역되어 사용되는가 하면 책 제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뭔가 낯설고 불완전해 보이며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책『세계사 특강』은 ‘거대사’보다는 인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정한 ‘세계사’의 목적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세계사 특강』은 21세기 들어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세계사 연구 흐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책이다. 20여 년에 걸친 여러 지역과 분야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토대로 ‘세계사의 기초’라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완성한 뒤, 다시 그 책임자였던 캔디스 고처와 린다 월튼이 집대성해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간했다. 특히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세계사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굵직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분야별로 패트릭 매닝(Migration in World History, 2005) 마크 엘빈(The Retreat of the Elephants: An Environmental History of China, 2004) 마이클 윌리엄스(Deforesting the Earth: From Prehistory to Global Crisis, 2003), 얼랜드 손튼(Reading History Sideways: The Fallacy and Enduring Impact of the Developmental Paradigm on Family Life, 2005), 케네스 포머런츠(The World That Trade Created: Society, Culture, and the World Economy, 1400 to the Present, 1999) 같은 이들의 책이 대표적이다.
가려서 뽑은 11가지 주제는 방대하고 다양한 인류 공동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역동적인 틀이 된다. 이런 주제들은 바로 근래에 인문학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책의 목차를 이주, 기술과 환경, 도시, 종교와 공동체, 가족, 문화와 기억, 젠더 …… 등으로 분류하여 그 속에 전통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역사를 녹여낸다.
우선 ‘세계사의 큰 그림’을 그리자!
오늘날 글로벌 사회에서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삶의 유형이 개개인의 일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 이미 소비와 문화의 형태로 뉴욕과 파리는 물론이고 프라하와 이스탄불, 쿠스코의 스타일이 우리 삶에 들어와 있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정보통신과 교통운수의 혁신으로 세계 시장과 인류 공동체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공간이 압축되고 인류의 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기껏해야 미군이나 일본인 관광객이 전부였던 한국 사회는 이제 일터와 생활공간에서도 피부색이 다양한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문화와 상품, 사람의 출발지였던 세계 여러 나라는 저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더구나 문명을 넘나드는 교류와 이주는 현대 사회에서만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영어를 말하고, 스파게티를 먹고, 뮤지컬이나 힙합을 즐기지만, 그 밑바탕에 있는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와 기억을 공유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다.
그 동안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나누어서 공부했다. 지역에 따라 서양사와 동양사로 나눔으로써 이슬람 문명이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륙의 역사는 변두리에 머물렀다. 또한 시대에 따라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로 나눔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연속성을 소홀히 해왔다. 그래서 지리적 공간과 시간의 통일된 역사인식을 통한 세계사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어려움이 컸다. 그런가 하면 지역과 시대로 나누어 공부해서 모자이크로 이어 붙이거나 역사를 정치사, 경제사, 과학기술사, 문화사 등 분야로 나눔으로써 입체적으로 세계사 인식보다는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의 위험성에 늘 취약했다. 세계사의 큰 그림을 바탕으로 다문화와 공존의 근거를 찾고 보다 폭넓은 교양 속에서 바람직한 세계관을 세울 수 있다.
세계사가 학문 분야로 형성된 20세기의 동력 가운데 하나는 ‘세계사’가 인류 공동의 미래에 관한 사상의 보고가 될 거라는 가능성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 현실에서 세계사는 과연 인류가 상상한 것을 달성할 가능성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시간과 경계를 넘는 역사 여행
이 책의 1장을 넘기면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5대양6대주로 퍼져 나가며 지구를 식민화한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역사의 시계도 그리스?로마에서 서유럽으로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와 몽골제국,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 제국,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 문화, 라틴아메리카의 잉카와 마야, 아프리카의 말리제국과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생각보다 거대했고 오늘날 세계의 큰 물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중해에서 인도양 해로와 비단길, 황금길, 대서양 무역과 동남아시아 해상교역 등 교류와 접촉의 경계에서 새로운 문화가 잉태되어 세계사의 모양새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유럽을 ‘세계’ 그 자체로 보았던 근대 역사학의 불구성은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의 세계대전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현대 산업사회의 구석 자리로 밀려난 ‘경계와 주변부’의 문화와 역사를 주목하고 존중한 점도 이 책의 특징을 이룬다. 이주민과 디아스포라, 크리오요, 해적, 해양세계는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킨 다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이들은 경계를 긋고 충돌에 개입하면서 변경지대에서 살아간 개인과 집단들은 역사적 변화를 이루어 낸 주체들이었다.
기술의 발전은 환경을 파괴한다?
인간이 자연 또는 환경과 맺는 관계의 밑바탕에는 기술과 문화가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며 기술과 문화를 변화 발전시켜 온 과정을 세계사라고 본다. 먼 옛날 현생인류의 등장으로 시작된 세계사는 거대한 자연에 적응하고 개조해 가면서 지구라는 행성을 ‘식민화’해 갔다. 인류 초기의 역사에서는 환경 조건이 여러 종류의 경제 발전을 결정했다. 심지어는 관개와 구릉의 계단식 재배 같은 기술을 통해 환경을 바꿀 수 있었던 시절에도 환경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2장).
하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도입된 기술의 변화는 석탄과 석유의 채굴에서 화학 오염에 이르기까지 환경을 과감하게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기술이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여건을 크게 향상시키고 환경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인간을 해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제품의 소비 증대와 과잉 소비가 낳은 폐기물이 한데 얽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한 나머지 이제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해서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지은이들은 환경이 세계사의 모양새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인류는 또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상호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환경이 기술의 변화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을까? 반대로 기술은 또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기술이나 경제 이상으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이해할 필요에 대해 반응해온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종교는 정치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며 정치와 서로 뒤엉켜 사회적 위계나 정치적 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관계를 강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는 또한 사회 조직을 분열시키거나 제도화된 형태의 권위나 권력 구조에 맞선 저항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문화적·민족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집단적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종교들이 분쟁을 부추기고 억압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인류의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근대사회가 종교의 가시적인 힘을 축소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21세기에는 세계사 속에서 여태까지 행사해 온 것만큼 강력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힘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개인과 가족인가, 국가와 민족인가!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의 주체인 가족과 가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가족과 가정의 모든 측면은 더욱 큰 유형의 역사적 변화, 곧 이주와 도시화, 국가와 제국의 흥망, 종교의 확장, 산업화, 정치 혁명 등과 교차하기도 하고 그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내리는 개인의 결정들(결혼을 할지 말지, 시기와 방법, 아이를 가질지 말지, 얼마나 낳을지)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세계사의 극적인 변화에 이바지해 왔다. 따라서 그 연속성을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유형에 따라 살펴보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인간의 친밀한 영역이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18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통해 비인격적이고 도시화된 공장제로 생산양식에 변화가 나타났고, 이런 현상은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점차 제국주의를 통해 전 세계로 확장되고 유럽의 경제와 유럽인들이 관리하는 식민지 경제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을 만들어 냈다. 20세기와 21세기에도 이러한 불균형은 형태를 바꿔 지속되고 있고 새로운 세계화 시대 또한 그 자체의 불균등한 발전을 만들어 냈다.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그 규모의 차이에 따라 집단적 정체성이 달라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혈연관계가 개인을 넘어서서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의 원천을 이루었고 그에 기초한 친족이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단위가 되었다. 이런 친족이 대규모의 공동체와 국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제국으로 이어졌다. 한편 집단적 정체성은 16세기에 시작해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세계화 과정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은 그 대신 전 지구적인 기술적, 경제적 연계를 통해 건설되고 그 힘은 국제 조직과 기구, 원조를 통해 과거보다 훨씬 섬세하게 발휘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세계화 자체가 이젠 더 이상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된 국민국가를 대신해 새로운 종류의 제국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국민국가가 사람들의 정치적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국제 테러리즘과 전 지구적인 경제의 상호 의존성으로 인한 불안 때문에 심지어 민족주의의 힘이 증대되었다고 주장한다.
세계사의 발전과 불평등은 동전의 양면?
현대에 들어와 불평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불평등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심지어 최초의 정주 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격차를 끝없이 강화하고 때로는 증대시키고 있다. 불평등의 구체적인 모습은 성별과 나이, 신분, 계급에서부터 인종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계사에 관한 질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가 어떻게, 왜 일부는 지배자가 되고 나머지는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는 위계 서열과 성 차별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불평등과 차이는 상속되거나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범주에서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범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사상과 물질적 조건을 통해서 표현된다. 차이는 개인과 집단으로 하여금 권력을 집중해 부와 권력과 기회를 취득할 전략을 펼 수 있도록 특권적인 지위와 불평등을 만들었고 또 제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근대 제국주의는 불평등이 제도화되면서 확산된 자본주의의 형태가 악화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슬럼화된 지구’로 묘사될 만큼 불평등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문명의 상징이라 일컫는 도시의 역사를 지나칠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과 자원, 환경을 관리할 필요에 따라 생기고 발전했다. 이런 필요는 다양한 경제 활동을 훨씬 다양하게 했고 도시 주민들을 더욱 엄격하게 구조화하고 조직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시 생활은 대개 더 많은 기회와 다양한 상품 및 서비스를 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계급과 지위, 성별에 따른 엄격한 구분과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오늘날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도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기억을 누가 전유할 것인가?
인간의 기억은 역사의 재료다. 기억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막연하고 거대한 과거를 의미 있는 사건들로 선별해 준다. 기억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둘 다 문화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역사는 오직 단선적인 연대기에 따라 과거를 구성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기억의 관계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과정을 통해서 맺어진다. 문화적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 특정 사회의 모든 경험과 정보, 사건에 축적되었고 다양한 문화 형태와 매체 속에 간직되어 있다.
문화적 기억은 교육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전승되거나 풍습과 관습을 통해서 비공식적으로 전승된다. 문화의 변화는, 환경과 기후의 변화 또는 전쟁과 정복 같은 물질적 환경이나 사상에 대한 반응이다. 기억은 역동적인 사회적 과정이기 때문에 기억 체계가 지식을 보존하거나 재생산할 때는 언제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을 이따금씩 바꾸거나 구체화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한다. 기억 체계는 공동체의 문화적 경험을 보관해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별적으로 지워 버린다.
근대의 역사학도 공동체를 규정하고 문화적 지식을 전달하는 기억 체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적 기억 체계의 인공물에는 시각예술 및 공연 예술과 문학, 제도, 건축, 기술 따위가 있다. 기억 체계는 역사와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고 규정하며 영속화해 나간다. 교사와 설교가, 역사가, 극작가, 기업가, 예술가 같은 문화적 전달자들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일꾼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적인 경계를 넘어 공동체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며 영속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 체계를 만들어 낸다. 이런 지식인들은 권력 기구와 지배층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지지하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도전한 사례도 많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문화적 기억 체계를 만들어 낼 권력은커녕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문화적 기억 체계는 대개 기관이나 집단의 통제를 받아 왔다. 정부나 교회를 비롯한 기관들이 만들어 내는 공식적인 기억은 기억을 선택할 뿐만 아니라 선택적 망각을 강요할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대중의 문화적 기억은 공연 예술이나 문학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대개는 공식적인 문화적 기억에 대한 저항의 표현 수단을 마련하고 자체적으로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원리를 따라서 문화 변화의 매개자 기능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정보 기술, 시각 예술, 번역문학, 다양한 교류를 통해 창작된 음악과 영화와 비디오가 현대 세계의 예술 형태를 결정하고 있다. 이 동영상들은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고 심오한 차이와 공통점을 지닌 문화적 기억을 탐구하는 보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변화의 속도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국경과 지역을 넘어 상상하자!
경계를 넘는 집단과 개인들도 있지만 국가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여권과 비자 등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여러 시민권 증서들의 유효성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 바로 자본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중앙 정부의 지배를 피하면서 세계 시장과 국제 투자에 따라 스스로 지키고 때로는 변신을 꾀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디아스포라의 정체성들이 확대됨에 따라 국민국가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민족적·종교적인 정체성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새로운 민족주의가 생겨나는 반대의 흐름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을 한 국민으로 동일시하면서도 ‘실제적인’ 국경이 없이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경 없는 국가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얘기한 ‘상상된 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이러한 구성체는 국경 없는 가상의 공동체가 일차적인 정체성의 원천이 된다. 혼합 문화나 크리오요 문화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규범이 되고 21세기의 기술 발달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국제주의’가 가속화될 것임을 예고해 준다.
20세기 들어 특히 인간의 과도한 상상과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때로는 그 반대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내고 재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가수 존 레논(1940~1980년)은 구름처럼 몰려든 청중들에게 전쟁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라’고 촉구했다. 이전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람들도 21세기의 교차로에서 인류 보편의 관심사와 상황이 어우러지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캔디스 고처 Candice Goucher
워싱턴주립대학(밴쿠버) 역사학과 교수이다.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세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학과 고고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대학(LA)에서 아프리카 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Cambridge History of the World(Cambridge University Press) vol. 9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린다 월튼과 함께 쓴 책 In the Balance: Themes in Global History(1998)가 있고, 영상 강의 프로그램 Banjeli: Technology and Gender in West African Iron-Making(1985)이 있다.
저자 : 린다 월튼 Linda A. Walton
포틀랜드주립대학(오리건) 역사학과 교수이다. 아시아 역사, 특히 중국 사회사와 지성사를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 웰슬리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캔디스 고처와 함께 쓴 책 In the Balance: Themes in Global History (McGraw-Hill, 1998)가 있고, Academies and Society in Southern Sung China(1999)를 썼다.
역자 : 황보영조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토지개혁을 둘러싼 각 정당과 사회단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스파냐 근현대사, 특히 에스파냐 내전과 프랑코 체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에서 아옌데까지, 다시 보는 세계의 혁명가들』(2007),『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2005)『대중독재』(2004)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전쟁의 패러다임』(루퍼트 스미스, 2008),『대중의 반역』(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2005),『정보와 전쟁』(존 키건, 2005)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 서문
머리말
1장 인류의 이주
2장 기술과 환경
3장 도시와 도시 생활
4장 종교와 공동체, 분쟁
5장 가족의 발견
6장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
7장 민족과 국가, 제국
8장 불평등, 지배와 저항
9장 문화와 기억, 역사
10장 경계 넘기: 경계, 접촉, 변경
11장 세계사의 갈림길과 상상
그림과 지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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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사’의 패러다임
역사학자 레프틴 스타브리아노스는 1958년 세계사가 “진정으로 새로운 지구적 관점”을 가진 역사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윌리엄 맥닐은 1976년 “젊은이들에게 국가의 틀을 넘어선 진정한 세계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은 1982년 세계사학회의 발족으로 이어졌고 1990년에는 학술지『저널 오브 월드 히스토리』가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도 2002년 역사학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미국의 세계사학회와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성과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사를 지향하는 시도는 더욱 확산되었다. 지난해에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공동연구를 통해 새로운 세계사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기도 했다[『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2009)].
한편으로는 국내에 ‘새로운 세계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history) 또는 ‘빅 히스토리’(Big Hhistory) 같은 용어가 ‘지구사’ ‘거대사’ ‘거시사’로 제각각 번역되어 사용되는가 하면 책 제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뭔가 낯설고 불완전해 보이며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책『세계사 특강』은 ‘거대사’보다는 인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정한 ‘세계사’의 목적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세계사 특강』은 21세기 들어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세계사 연구 흐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책이다. 20여 년에 걸친 여러 지역과 분야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토대로 ‘세계사의 기초’라는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완성한 뒤, 다시 그 책임자였던 캔디스 고처와 린다 월튼이 집대성해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간했다. 특히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세계사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굵직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분야별로 패트릭 매닝(Migration in World History, 2005) 마크 엘빈(The Retreat of the Elephants: An Environmental History of China, 2004) 마이클 윌리엄스(Deforesting the Earth: From Prehistory to Global Crisis, 2003), 얼랜드 손튼(Reading History Sideways: The Fallacy and Enduring Impact of the Developmental Paradigm on Family Life, 2005), 케네스 포머런츠(The World That Trade Created: Society, Culture, and the World Economy, 1400 to the Present, 1999) 같은 이들의 책이 대표적이다.
가려서 뽑은 11가지 주제는 방대하고 다양한 인류 공동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역동적인 틀이 된다. 이런 주제들은 바로 근래에 인문학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책의 목차를 이주, 기술과 환경, 도시, 종교와 공동체, 가족, 문화와 기억, 젠더 …… 등으로 분류하여 그 속에 전통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역사를 녹여낸다.
우선 ‘세계사의 큰 그림’을 그리자!
오늘날 글로벌 사회에서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삶의 유형이 개개인의 일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 이미 소비와 문화의 형태로 뉴욕과 파리는 물론이고 프라하와 이스탄불, 쿠스코의 스타일이 우리 삶에 들어와 있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정보통신과 교통운수의 혁신으로 세계 시장과 인류 공동체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공간이 압축되고 인류의 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기껏해야 미군이나 일본인 관광객이 전부였던 한국 사회는 이제 일터와 생활공간에서도 피부색이 다양한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문화와 상품, 사람의 출발지였던 세계 여러 나라는 저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더구나 문명을 넘나드는 교류와 이주는 현대 사회에서만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영어를 말하고, 스파게티를 먹고, 뮤지컬이나 힙합을 즐기지만, 그 밑바탕에 있는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와 기억을 공유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다.
그 동안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나누어서 공부했다. 지역에 따라 서양사와 동양사로 나눔으로써 이슬람 문명이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륙의 역사는 변두리에 머물렀다. 또한 시대에 따라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로 나눔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연속성을 소홀히 해왔다. 그래서 지리적 공간과 시간의 통일된 역사인식을 통한 세계사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어려움이 컸다. 그런가 하면 지역과 시대로 나누어 공부해서 모자이크로 이어 붙이거나 역사를 정치사, 경제사, 과학기술사, 문화사 등 분야로 나눔으로써 입체적으로 세계사 인식보다는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의 위험성에 늘 취약했다. 세계사의 큰 그림을 바탕으로 다문화와 공존의 근거를 찾고 보다 폭넓은 교양 속에서 바람직한 세계관을 세울 수 있다.
세계사가 학문 분야로 형성된 20세기의 동력 가운데 하나는 ‘세계사’가 인류 공동의 미래에 관한 사상의 보고가 될 거라는 가능성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 현실에서 세계사는 과연 인류가 상상한 것을 달성할 가능성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시간과 경계를 넘는 역사 여행
이 책의 1장을 넘기면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5대양6대주로 퍼져 나가며 지구를 식민화한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역사의 시계도 그리스?로마에서 서유럽으로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와 몽골제국,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 제국,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 문화, 라틴아메리카의 잉카와 마야, 아프리카의 말리제국과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생각보다 거대했고 오늘날 세계의 큰 물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중해에서 인도양 해로와 비단길, 황금길, 대서양 무역과 동남아시아 해상교역 등 교류와 접촉의 경계에서 새로운 문화가 잉태되어 세계사의 모양새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유럽을 ‘세계’ 그 자체로 보았던 근대 역사학의 불구성은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의 세계대전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현대 산업사회의 구석 자리로 밀려난 ‘경계와 주변부’의 문화와 역사를 주목하고 존중한 점도 이 책의 특징을 이룬다. 이주민과 디아스포라, 크리오요, 해적, 해양세계는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킨 다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이들은 경계를 긋고 충돌에 개입하면서 변경지대에서 살아간 개인과 집단들은 역사적 변화를 이루어 낸 주체들이었다.
기술의 발전은 환경을 파괴한다?
인간이 자연 또는 환경과 맺는 관계의 밑바탕에는 기술과 문화가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며 기술과 문화를 변화 발전시켜 온 과정을 세계사라고 본다. 먼 옛날 현생인류의 등장으로 시작된 세계사는 거대한 자연에 적응하고 개조해 가면서 지구라는 행성을 ‘식민화’해 갔다. 인류 초기의 역사에서는 환경 조건이 여러 종류의 경제 발전을 결정했다. 심지어는 관개와 구릉의 계단식 재배 같은 기술을 통해 환경을 바꿀 수 있었던 시절에도 환경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2장).
하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도입된 기술의 변화는 석탄과 석유의 채굴에서 화학 오염에 이르기까지 환경을 과감하게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기술이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여건을 크게 향상시키고 환경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인간을 해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제품의 소비 증대와 과잉 소비가 낳은 폐기물이 한데 얽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한 나머지 이제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해서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지은이들은 환경이 세계사의 모양새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인류는 또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상호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환경이 기술의 변화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을까? 반대로 기술은 또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기술이나 경제 이상으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이해할 필요에 대해 반응해온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종교는 정치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며 정치와 서로 뒤엉켜 사회적 위계나 정치적 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관계를 강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는 또한 사회 조직을 분열시키거나 제도화된 형태의 권위나 권력 구조에 맞선 저항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문화적·민족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집단적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종교들이 분쟁을 부추기고 억압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인류의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근대사회가 종교의 가시적인 힘을 축소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21세기에는 세계사 속에서 여태까지 행사해 온 것만큼 강력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힘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개인과 가족인가, 국가와 민족인가!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의 주체인 가족과 가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가족과 가정의 모든 측면은 더욱 큰 유형의 역사적 변화, 곧 이주와 도시화, 국가와 제국의 흥망, 종교의 확장, 산업화, 정치 혁명 등과 교차하기도 하고 그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사생활의 영역에서 내리는 개인의 결정들(결혼을 할지 말지, 시기와 방법, 아이를 가질지 말지, 얼마나 낳을지)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세계사의 극적인 변화에 이바지해 왔다. 따라서 그 연속성을 시간의 흐름과 문화의 유형에 따라 살펴보면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인간의 친밀한 영역이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18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통해 비인격적이고 도시화된 공장제로 생산양식에 변화가 나타났고, 이런 현상은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점차 제국주의를 통해 전 세계로 확장되고 유럽의 경제와 유럽인들이 관리하는 식민지 경제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을 만들어 냈다. 20세기와 21세기에도 이러한 불균형은 형태를 바꿔 지속되고 있고 새로운 세계화 시대 또한 그 자체의 불균등한 발전을 만들어 냈다.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그 규모의 차이에 따라 집단적 정체성이 달라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혈연관계가 개인을 넘어서서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의 원천을 이루었고 그에 기초한 친족이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단위가 되었다. 이런 친족이 대규모의 공동체와 국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제국으로 이어졌다. 한편 집단적 정체성은 16세기에 시작해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세계화 과정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은 그 대신 전 지구적인 기술적, 경제적 연계를 통해 건설되고 그 힘은 국제 조직과 기구, 원조를 통해 과거보다 훨씬 섬세하게 발휘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세계화 자체가 이젠 더 이상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된 국민국가를 대신해 새로운 종류의 제국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국민국가가 사람들의 정치적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국제 테러리즘과 전 지구적인 경제의 상호 의존성으로 인한 불안 때문에 심지어 민족주의의 힘이 증대되었다고 주장한다.
세계사의 발전과 불평등은 동전의 양면?
현대에 들어와 불평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불평등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심지어 최초의 정주 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격차를 끝없이 강화하고 때로는 증대시키고 있다. 불평등의 구체적인 모습은 성별과 나이, 신분, 계급에서부터 인종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계사에 관한 질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가 어떻게, 왜 일부는 지배자가 되고 나머지는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는 위계 서열과 성 차별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불평등과 차이는 상속되거나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범주에서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범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사상과 물질적 조건을 통해서 표현된다. 차이는 개인과 집단으로 하여금 권력을 집중해 부와 권력과 기회를 취득할 전략을 펼 수 있도록 특권적인 지위와 불평등을 만들었고 또 제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근대 제국주의는 불평등이 제도화되면서 확산된 자본주의의 형태가 악화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슬럼화된 지구’로 묘사될 만큼 불평등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문명의 상징이라 일컫는 도시의 역사를 지나칠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과 자원, 환경을 관리할 필요에 따라 생기고 발전했다. 이런 필요는 다양한 경제 활동을 훨씬 다양하게 했고 도시 주민들을 더욱 엄격하게 구조화하고 조직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시 생활은 대개 더 많은 기회와 다양한 상품 및 서비스를 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계급과 지위, 성별에 따른 엄격한 구분과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오늘날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도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기억을 누가 전유할 것인가?
인간의 기억은 역사의 재료다. 기억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막연하고 거대한 과거를 의미 있는 사건들로 선별해 준다. 기억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둘 다 문화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역사는 오직 단선적인 연대기에 따라 과거를 구성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기억의 관계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과정을 통해서 맺어진다. 문화적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 특정 사회의 모든 경험과 정보, 사건에 축적되었고 다양한 문화 형태와 매체 속에 간직되어 있다.
문화적 기억은 교육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전승되거나 풍습과 관습을 통해서 비공식적으로 전승된다. 문화의 변화는, 환경과 기후의 변화 또는 전쟁과 정복 같은 물질적 환경이나 사상에 대한 반응이다. 기억은 역동적인 사회적 과정이기 때문에 기억 체계가 지식을 보존하거나 재생산할 때는 언제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을 이따금씩 바꾸거나 구체화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한다. 기억 체계는 공동체의 문화적 경험을 보관해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별적으로 지워 버린다.
근대의 역사학도 공동체를 규정하고 문화적 지식을 전달하는 기억 체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적 기억 체계의 인공물에는 시각예술 및 공연 예술과 문학, 제도, 건축, 기술 따위가 있다. 기억 체계는 역사와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을 구성하고 규정하며 영속화해 나간다. 교사와 설교가, 역사가, 극작가, 기업가, 예술가 같은 문화적 전달자들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일꾼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적인 경계를 넘어 공동체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며 영속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 체계를 만들어 낸다. 이런 지식인들은 권력 기구와 지배층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지지하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도전한 사례도 많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문화적 기억 체계를 만들어 낼 권력은커녕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문화적 기억 체계는 대개 기관이나 집단의 통제를 받아 왔다. 정부나 교회를 비롯한 기관들이 만들어 내는 공식적인 기억은 기억을 선택할 뿐만 아니라 선택적 망각을 강요할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대중의 문화적 기억은 공연 예술이나 문학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대개는 공식적인 문화적 기억에 대한 저항의 표현 수단을 마련하고 자체적으로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원리를 따라서 문화 변화의 매개자 기능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정보 기술, 시각 예술, 번역문학, 다양한 교류를 통해 창작된 음악과 영화와 비디오가 현대 세계의 예술 형태를 결정하고 있다. 이 동영상들은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고 심오한 차이와 공통점을 지닌 문화적 기억을 탐구하는 보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변화의 속도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국경과 지역을 넘어 상상하자!
경계를 넘는 집단과 개인들도 있지만 국가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여권과 비자 등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여러 시민권 증서들의 유효성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 바로 자본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중앙 정부의 지배를 피하면서 세계 시장과 국제 투자에 따라 스스로 지키고 때로는 변신을 꾀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디아스포라의 정체성들이 확대됨에 따라 국민국가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민족적·종교적인 정체성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새로운 민족주의가 생겨나는 반대의 흐름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을 한 국민으로 동일시하면서도 ‘실제적인’ 국경이 없이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경 없는 국가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얘기한 ‘상상된 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이러한 구성체는 국경 없는 가상의 공동체가 일차적인 정체성의 원천이 된다. 혼합 문화나 크리오요 문화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규범이 되고 21세기의 기술 발달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국제주의’가 가속화될 것임을 예고해 준다.
20세기 들어 특히 인간의 과도한 상상과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때로는 그 반대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내고 재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가수 존 레논(1940~1980년)은 구름처럼 몰려든 청중들에게 전쟁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라’고 촉구했다. 이전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람들도 21세기의 교차로에서 인류 보편의 관심사와 상황이 어우러지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캔디스 고처 Candice Goucher
워싱턴주립대학(밴쿠버) 역사학과 교수이다.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세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학과 고고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대학(LA)에서 아프리카 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Cambridge History of the World(Cambridge University Press) vol. 9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린다 월튼과 함께 쓴 책 In the Balance: Themes in Global History(1998)가 있고, 영상 강의 프로그램 Banjeli: Technology and Gender in West African Iron-Making(1985)이 있다.
저자 : 린다 월튼 Linda A. Walton
포틀랜드주립대학(오리건) 역사학과 교수이다. 아시아 역사, 특히 중국 사회사와 지성사를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다. 웰슬리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캔디스 고처와 함께 쓴 책 In the Balance: Themes in Global History (McGraw-Hill, 1998)가 있고, Academies and Society in Southern Sung China(1999)를 썼다.
역자 : 황보영조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토지개혁을 둘러싼 각 정당과 사회단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스파냐 근현대사, 특히 에스파냐 내전과 프랑코 체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에서 아옌데까지, 다시 보는 세계의 혁명가들』(2007),『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2005)『대중독재』(2004)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전쟁의 패러다임』(루퍼트 스미스, 2008),『대중의 반역』(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2005),『정보와 전쟁』(존 키건, 2005)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 서문
머리말
1장 인류의 이주
2장 기술과 환경
3장 도시와 도시 생활
4장 종교와 공동체, 분쟁
5장 가족의 발견
6장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
7장 민족과 국가, 제국
8장 불평등, 지배와 저항
9장 문화와 기억, 역사
10장 경계 넘기: 경계, 접촉, 변경
11장 세계사의 갈림길과 상상
그림과 지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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