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노비의 법정 투쟁기
1586년 나주 관아의 노비소송을 서사 구조로 하는 이 책을 따라가 보면, 조선시대의 사법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절차를 통해 당시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의 양태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윽고 불화의 핵심에 선 조선시대 ‘노비제’를 만난다.
오늘날에는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노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옛일이 되었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이라는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이 자신의 자손들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고와 피고가 구술 또는 문서로 제 주장을 한껏 토해내던 조선시대의 송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소송의 문제를 단지 법제사가 아니라 운영과 실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자 하는 저자의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의 핵심 모티브인 이지도 판결문과 4건의 입안은 학봉 김성일 종택에 연원을 알 수 없는 채로 묻혀 있던 고문서로, 저자가 밝혀낸 것이다.
1. 사건의 전모 - 여든 살의 양인 노파, 성균관에 관비로 투탁하다
1586년(선조 19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송관은 학봉 김성일이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라고 반박한다.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왜 다물사리는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 연유는 극적인 반전 속에 드러난다. 원고와 피고는 그 해 4월 3일까지 주장과 증거 제출을 마쳤다. 그리고 그 해 4월 19일 판결이 내려졌다. “저는 양인이 아니라 노비이옵니다.”라며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다물사리의 법정투쟁, 과연 그 결과는 어떠할까.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을 해달라는 ‘시송다짐’을 한 후 최초 진술인 ‘��障꾼卜椒끝��한다. 이지도는 다물사리의 남편이 이지도의 아버지 소유의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 또한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양천제). 그러나 다물사리는 자기가 성균관 소속의 관비인 길덕의 딸로서 자기 자신 또한 관비라는 주장을 펼친다. 부모가 모두 천민일 경우 아버지가 사노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관비일 경우 자손들은 모계를 따라 모두 관비가 되기 때문에 다물사리는 자기 후손들을 혹독한 처우의 사노비 대신 비교적 고통이 덜한 관노비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때는 진술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송관 김성일은 증거조사에 들어간다. 먼저 국가의 공적 장부인 호적을 조사한 뒤 그 결과를 놓고 당사자 또는 증인을 불러 신문한다. 호적을 조사할 때는 보통의 계보 외에도, 원고의 경우 멀쩡한 양인을 자기 노비라고 호적에 올리는 것 - 이를 ‘암록(暗錄)’이라 한다 - 이 아닌지, 이와 반대로 피고의 경우 역을 회피하기 위해 세력가나 기관에 몸을 맡기는 행위인 ‘투탁(投託)’을 하지 않았는지도 따져본다. 드디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판결이 내려진다.
학봉의 판결에 따르면, 다물사리는 자기 자손들을 사노비에서 관노비로 바꾸려고 사위인 구지와 공모하여 성균관에 투탁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물사리가 양인인 경우 남편이 사노였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모두 사노비가 되어야 하지만, 만약 관비일 경우라면 모계를 따라 그 후손들은 모두 관노비가 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결국 김성일은 민사 판결로써 다물사리의 딸 인이와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의 어머니 서씨 부인에게 지급하라고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 책의 저자는 소송의 전모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논점을 제시하는 가운데 이 재판의 매우 흥미로운 이면들도 조명해준다. 독자들은 소송 당시 다물사리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는데, 그처럼 노쇠한 여인이 대담하게도 성균관에 투탁하여 신분을 숨기고 상대편의 소송에 맞서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물사리의 뒤에는 그의 사위인 구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 또한 사노비로서 자기 자식들을 어떻게든 사노비의 사슬에서 끌어내 관노비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게끔 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지도의 집안의 허술한 틈(저자는 이지도의 아버지가 이유겸임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이유겸은 살인 혐의로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을 노려 자기 장모로 하여금 투탁하도록 하는 꾀를 내고 지방 관아의 노비빗리와 공모하여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물사리와 구지의 기구한 사연은 조선시대 노비제도가 얼마나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노비제를 고수하는 양반의 모순에 찬 면모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
이 책의 2장에 소개하는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에서는 노비제 고수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양반과 그들의 모순에 찬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소송은 허관손이란 인물의 제소로 시작된다. 그는 지방의 아전이었으나 그의 장모의 아버지가 사노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 모두 노비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장모의 아버지가 보충대에 입속하였으므로 양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서출자녀인 경우 보충대 입속을 통해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송의 상대는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암 유희춘이었다. 1544년 강진현에서 유희춘의 어머니, 최씨가 승소한다. 1551년에는 허관손이 승소하고, 1564년 최씨 사후 미암의 누나가 다시 제소하여 승소한다. 1566년 허관손이 사헌부에 상소했으나 패소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위관료 유희춘을 상대로 한 아전 허관손의 30여년이 넘은 투쟁은, 결국 1568년 3월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엎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 이를 ‘상언’이라 한다 - 해결하려 했지만 현직 관리의 영향력을 넘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흥미로운 사실은 허관손이 양인이라 증명하려 했던 방식대로 유희춘은 자신의 얼녀 네 명을 속량시켰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희춘이 허관손에게 승소한 그 시점인 1568년부터 자신의 서출자녀들을 보충대에 입속시키고 대가를 지불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나게 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암은 8년에 걸쳐 천첩 자식들을 모두 속량한 뒤 외친다. “얼녀 네 명이 모두 몸을 씻어 양인이 되었다. 어찌 이리 기쁜지!”(미암일기초 5권 230쪽) 내적 갈등이나 모순적 의식조차 보이지 않는다. 유희춘과 허관손의 쟁송 사례에는 당시 최고 지식인이 가진 의식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얼녀들에 대해서는 속신을 시키려 그처럼 안타까워하면서도 허관손의 후손에 대해서는 면천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 셈이다.
3.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법의 풍경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420여 년 전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한 노비 소송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사법의 풍경을 한눈에 드러낸다. 원고와 피고가 구술 또는 문서로 제 주장을 한껏 토해내던 조선시대의 송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소송의 문제를 법제사가 아니라 운영과 실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저자의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시대의 법체계가 매우 정교하고도 합리적이라는 점에 놀라게 된다. 우선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될 경우 소송을 다른 곳에서 할 수 있게 한 ‘관할과 상피’ 제도가 그 예이다. 이지도ㆍ다물사리 소송도 처음에는 영암군에서 제기되었지만 영암군의 아전과 짜고 벌인 일이라는 이지도의 주장 때문에 나주로 이송된 것이다. 1583년 경상도 의성에서 이함과 김사원 사이에 벌어진 소송에서도 송관에 대한 기피 신청이 받아들여진 바 있다. 또한 심급제도를 통해 세 번까지 제소할 수 있도록 한 점, 그리고 ‘심도득신법’에 따라 세 번의 재판에서 패소하였더라도 그 과정에 하자가 있을 경우에는 다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허관손은(미암과의 소송에서) 송정을 바꾸어 가며 여러 차례 제소를 한다. 즉 지방관에서 패소해도 포기하기 않고 상급 관청에 다시 제소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심급제도를 자연스레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민사소송도 현재처럼 철저한 당사자주의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법정에서 벌어진 ‘버릇 없이’ 사건을 보더라도 오히려 현재가 이 원칙보다는 법관의 직권적 운영이 강한 것은 아닐까.
아울러 저자는 조선시대의 소송의 운영과 실제에 대해 오늘날의 재판과정과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즉, 당대의 법률용어와 소송의 절차, 법률문서, 지원인력, 법률의 적용, 소송법서, 법전과 수교 등에 관한 내용이다. 누군가 관청에 판결을 구하는 소지(所志)를 내면 그것은 곧 오늘날의 소장이 된다. 그리고 그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는데 이를 제김〔題音〕이라 한다. 소지를 낸 사람은 피고를 직접 송정에 데려와야 하며, 만약 피고가 불응할 경우에 대한 조처도 있다. 그리고 관청에서 작성하는 제김(공문서)은 한자와 이두를 섞어서 쓰고 있으며 그 작성자는 대개 아전들이다. 재판 과정을 주도하는 송관은 1차적으로 지방의 수령들이 맡고 상급심은 각 도의 감영과 형조 등에서 관할한다. 송관은 법전에 따라 판결하되 임시법안인 수교(受敎)를 따르기도 하고 ?률지침서인 각종의 소송법서들도 참조한다. 당시의 소송법서들은 구체적인 소송절차와 함께 그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것이어서 일반인들이 참조하기에도 아주 용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조선전기의 소송법서는 『사송유취』뿐이다.
“우리나라에는 한 종밖에 없는 16세기 민사소송 실무 매뉴얼이 일본에는 여러 종류가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도쿄, 쭈쿠바, 나고야 등지의 도서관을 돌면서 그것을 확인할 때는 정말 가슴이 벅찼고, 이 자료들이 일본으로 유출된 계기가 임진란이라는 것을 규명하고는 안타까움도 좀 느꼈지요.” - 머리말 중에서
4. 노비제는 조선시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오늘날에는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노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옛일이 되었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이 자신의 자손들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비제의 문제는 국왕도 손대지 못하였다. 특히 중화의 예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노비를 명나라에서처럼 고공(雇工:머슴)제로 전환하는 것만은 철저히 거부했던 선비들의 태도는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노비제가 조선시대의 신분제, 나아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관건이라 본다. 학계에서는 노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논쟁이 있어 왔지만 아직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며 “신분이라는 것이 지극히 법률적인 개념인데도 노비의 법적 성격에 대해 거의 외면한 채 진행된 것은 따져 볼 여지가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송에서도 당사자능력이나 소송능력이 양반이나 상민과 구별 없이 인정되어, 자신의 소송을 수행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상전의 소송을 대송하는 등 소송대리권도 있었다. 로마의 노예가 자신의 소송은 물론 타인의 소송조차 수행할 수 없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노비의 성격을 달리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설명하며 노비제에 대해 학계의 총체적인 논의를 제의한다.
이 책의 서사가 되는 이지도ㆍ다물사리 판결문서는 안동의 학봉 김성일 종택에서 소장한 수많은 고문서 사이에 있었다. 5건의 문서들이 연원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발급연대를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의성 김씨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간지, 연호, 인물들의 나이, 지명, 판결한 이의 서명, 분쟁 사항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대조해 나가자 매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다섯 건의 결송입안이 모두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재직했던 시기에 처리한 판결문이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민사소송과 소송이론의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발굴한 이 판결문들과 『경북고문서집성』 등에서 수집된 결송입안들, 개인 문집 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이 책을 쓴 뒤 머리말에서 “소설처럼 읽히길 바랐지만 픽션은 아니기에 모든 글월과 낱말이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재삼 검토하면서 진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임상혁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사, 같은 대학 대학원 법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근무했다. 현재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민사소송법의 해석론과 함께 그 성립 연혁에 주의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역사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의 역할에 관심을 쏟고 있다. 「법원의 ADR」, 「개정 민사소송법에서 전자문서의 개념과 증명력」, 「거창사건 관련 판결과 소멸시효 항변」, 「소송 기피의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와 한국사회」, 「조선전기 민사소송과 소송이론의 전개」 등의 글들이 있다.
▣ 주요 목차
1장 1586년 노비소송 “나는 노비로소이다”
법정의 모습 ― 선조 19년 나주관아 / 원님재판 / 결송입안과 문서생활 / 1586년 이지도·다물사리 판결문 / 송관 김성일 / 올곧은 법관의 수난 / 부임과 파직 / 관할과 상피
칼럼1_명판결의 한 사례
2장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
허관손의 상언 / 천처첩자녀가 양인이 되는 길 / 유희춘의 자녀들 / 얼녀 네 명이 모두 양인이 되다 / 임금에게까지 호소하다 / 황새 결송 / 심급제도 / 삼도득신법의 등장 / 삼도득신법에 대한 반발
3장 법에 따라 심리한다
소송의 비롯 / 민사소송과 형사소송 / 공문서와 이두 / 아전 / 향리의 역할 / 법 적용을 다투다 / 소송법서 / 『사송유취』 / 실체법과 절차법 / 수교와 법전
칼럼2_재판과 조정
4장 진실을 찾아서
나주법정에 이르다 / 원고 “다물사리는 양인입니다!” / 피고 “저는 노비이옵니다!” / 신분과 성명 / 증거조사 / 호적 상고 / 압량위천과 암록 / 조사 결과와 증인 신문 / 투탁 / 공천과 사천 / 다물사리, 착명을 거부하다 / 도장 / 추정소지
5장 재판과 사회
원고와 피고의 변론이 종결되다 / 판결이 내려지다 / 사건의 전모 / 구지의 작전 / 이지도의 사정 / 반전 / 분쟁과 재판 / 노비제사회 / 소송비용 / 판결의 증명 / 소송과 권리 실현 / 소송과 법제
칼럼3_소송을 꺼리는 문화적 전통
부록
1) 1517년 노비결송입안-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 소장
2) 이지도 판결문 전문
“나는 백성이 아니옵니다. 노비이옵니다”
-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노비의 법정 투쟁기
1586년 나주 관아의 노비소송을 서사 구조로 하는 이 책을 따라가 보면, 조선시대의 사법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절차를 통해 당시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의 양태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윽고 불화의 핵심에 선 조선시대 ‘노비제’를 만난다.
오늘날에는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노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옛일이 되었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이라는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이 자신의 자손들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고와 피고가 구술 또는 문서로 제 주장을 한껏 토해내던 조선시대의 송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소송의 문제를 단지 법제사가 아니라 운영과 실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자 하는 저자의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의 핵심 모티브인 이지도 판결문과 4건의 입안은 학봉 김성일 종택에 연원을 알 수 없는 채로 묻혀 있던 고문서로, 저자가 밝혀낸 것이다.
1. 사건의 전모 - 여든 살의 양인 노파, 성균관에 관비로 투탁하다
1586년(선조 19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송관은 학봉 김성일이다. 원고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이라 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자신이 노비라고 반박한다.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왜 다물사리는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 연유는 극적인 반전 속에 드러난다. 원고와 피고는 그 해 4월 3일까지 주장과 증거 제출을 마쳤다. 그리고 그 해 4월 19일 판결이 내려졌다. “저는 양인이 아니라 노비이옵니다.”라며 조선의 백성이길 거부한 다물사리의 법정투쟁, 과연 그 결과는 어떠할까.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을 해달라는 ‘시송다짐’을 한 후 최초 진술인 ‘��障꾼卜椒끝��한다. 이지도는 다물사리의 남편이 이지도의 아버지 소유의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 또한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양천제). 그러나 다물사리는 자기가 성균관 소속의 관비인 길덕의 딸로서 자기 자신 또한 관비라는 주장을 펼친다. 부모가 모두 천민일 경우 아버지가 사노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관비일 경우 자손들은 모계를 따라 모두 관비가 되기 때문에 다물사리는 자기 후손들을 혹독한 처우의 사노비 대신 비교적 고통이 덜한 관노비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때는 진술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송관 김성일은 증거조사에 들어간다. 먼저 국가의 공적 장부인 호적을 조사한 뒤 그 결과를 놓고 당사자 또는 증인을 불러 신문한다. 호적을 조사할 때는 보통의 계보 외에도, 원고의 경우 멀쩡한 양인을 자기 노비라고 호적에 올리는 것 - 이를 ‘암록(暗錄)’이라 한다 - 이 아닌지, 이와 반대로 피고의 경우 역을 회피하기 위해 세력가나 기관에 몸을 맡기는 행위인 ‘투탁(投託)’을 하지 않았는지도 따져본다. 드디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판결이 내려진다.
학봉의 판결에 따르면, 다물사리는 자기 자손들을 사노비에서 관노비로 바꾸려고 사위인 구지와 공모하여 성균관에 투탁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물사리가 양인인 경우 남편이 사노였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모두 사노비가 되어야 하지만, 만약 관비일 경우라면 모계를 따라 그 후손들은 모두 관노비가 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결국 김성일은 민사 판결로써 다물사리의 딸 인이와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의 어머니 서씨 부인에게 지급하라고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 책의 저자는 소송의 전모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논점을 제시하는 가운데 이 재판의 매우 흥미로운 이면들도 조명해준다. 독자들은 소송 당시 다물사리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는데, 그처럼 노쇠한 여인이 대담하게도 성균관에 투탁하여 신분을 숨기고 상대편의 소송에 맞서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물사리의 뒤에는 그의 사위인 구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 또한 사노비로서 자기 자식들을 어떻게든 사노비의 사슬에서 끌어내 관노비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게끔 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지도의 집안의 허술한 틈(저자는 이지도의 아버지가 이유겸임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이유겸은 살인 혐의로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을 노려 자기 장모로 하여금 투탁하도록 하는 꾀를 내고 지방 관아의 노비빗리와 공모하여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물사리와 구지의 기구한 사연은 조선시대 노비제도가 얼마나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노비제를 고수하는 양반의 모순에 찬 면모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
이 책의 2장에 소개하는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에서는 노비제 고수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양반과 그들의 모순에 찬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소송은 허관손이란 인물의 제소로 시작된다. 그는 지방의 아전이었으나 그의 장모의 아버지가 사노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 모두 노비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장모의 아버지가 보충대에 입속하였으므로 양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서출자녀인 경우 보충대 입속을 통해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송의 상대는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암 유희춘이었다. 1544년 강진현에서 유희춘의 어머니, 최씨가 승소한다. 1551년에는 허관손이 승소하고, 1564년 최씨 사후 미암의 누나가 다시 제소하여 승소한다. 1566년 허관손이 사헌부에 상소했으나 패소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위관료 유희춘을 상대로 한 아전 허관손의 30여년이 넘은 투쟁은, 결국 1568년 3월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엎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 이를 ‘상언’이라 한다 - 해결하려 했지만 현직 관리의 영향력을 넘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흥미로운 사실은 허관손이 양인이라 증명하려 했던 방식대로 유희춘은 자신의 얼녀 네 명을 속량시켰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희춘이 허관손에게 승소한 그 시점인 1568년부터 자신의 서출자녀들을 보충대에 입속시키고 대가를 지불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나게 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암은 8년에 걸쳐 천첩 자식들을 모두 속량한 뒤 외친다. “얼녀 네 명이 모두 몸을 씻어 양인이 되었다. 어찌 이리 기쁜지!”(미암일기초 5권 230쪽) 내적 갈등이나 모순적 의식조차 보이지 않는다. 유희춘과 허관손의 쟁송 사례에는 당시 최고 지식인이 가진 의식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얼녀들에 대해서는 속신을 시키려 그처럼 안타까워하면서도 허관손의 후손에 대해서는 면천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 셈이다.
3.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법의 풍경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420여 년 전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한 노비 소송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사법의 풍경을 한눈에 드러낸다. 원고와 피고가 구술 또는 문서로 제 주장을 한껏 토해내던 조선시대의 송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소송의 문제를 법제사가 아니라 운영과 실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저자의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시대의 법체계가 매우 정교하고도 합리적이라는 점에 놀라게 된다. 우선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될 경우 소송을 다른 곳에서 할 수 있게 한 ‘관할과 상피’ 제도가 그 예이다. 이지도ㆍ다물사리 소송도 처음에는 영암군에서 제기되었지만 영암군의 아전과 짜고 벌인 일이라는 이지도의 주장 때문에 나주로 이송된 것이다. 1583년 경상도 의성에서 이함과 김사원 사이에 벌어진 소송에서도 송관에 대한 기피 신청이 받아들여진 바 있다. 또한 심급제도를 통해 세 번까지 제소할 수 있도록 한 점, 그리고 ‘심도득신법’에 따라 세 번의 재판에서 패소하였더라도 그 과정에 하자가 있을 경우에는 다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허관손은(미암과의 소송에서) 송정을 바꾸어 가며 여러 차례 제소를 한다. 즉 지방관에서 패소해도 포기하기 않고 상급 관청에 다시 제소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심급제도를 자연스레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민사소송도 현재처럼 철저한 당사자주의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법정에서 벌어진 ‘버릇 없이’ 사건을 보더라도 오히려 현재가 이 원칙보다는 법관의 직권적 운영이 강한 것은 아닐까.
아울러 저자는 조선시대의 소송의 운영과 실제에 대해 오늘날의 재판과정과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즉, 당대의 법률용어와 소송의 절차, 법률문서, 지원인력, 법률의 적용, 소송법서, 법전과 수교 등에 관한 내용이다. 누군가 관청에 판결을 구하는 소지(所志)를 내면 그것은 곧 오늘날의 소장이 된다. 그리고 그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는데 이를 제김〔題音〕이라 한다. 소지를 낸 사람은 피고를 직접 송정에 데려와야 하며, 만약 피고가 불응할 경우에 대한 조처도 있다. 그리고 관청에서 작성하는 제김(공문서)은 한자와 이두를 섞어서 쓰고 있으며 그 작성자는 대개 아전들이다. 재판 과정을 주도하는 송관은 1차적으로 지방의 수령들이 맡고 상급심은 각 도의 감영과 형조 등에서 관할한다. 송관은 법전에 따라 판결하되 임시법안인 수교(受敎)를 따르기도 하고 ?률지침서인 각종의 소송법서들도 참조한다. 당시의 소송법서들은 구체적인 소송절차와 함께 그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것이어서 일반인들이 참조하기에도 아주 용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조선전기의 소송법서는 『사송유취』뿐이다.
“우리나라에는 한 종밖에 없는 16세기 민사소송 실무 매뉴얼이 일본에는 여러 종류가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도쿄, 쭈쿠바, 나고야 등지의 도서관을 돌면서 그것을 확인할 때는 정말 가슴이 벅찼고, 이 자료들이 일본으로 유출된 계기가 임진란이라는 것을 규명하고는 안타까움도 좀 느꼈지요.” - 머리말 중에서
4. 노비제는 조선시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오늘날에는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노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옛일이 되었다. 흔히 조선전기는 ‘노비송(奴婢訟)’, 후기는 ‘산송(山訟)’ 표현처럼 조선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노비제의 질곡이 주요한 내적 모순으로 존재하였다. 다물사리와 구지, 허관손이 자신의 자손들을 사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기는 조선시대의 노비제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혹독한 질곡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비제의 문제는 국왕도 손대지 못하였다. 특히 중화의 예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노비를 명나라에서처럼 고공(雇工:머슴)제로 전환하는 것만은 철저히 거부했던 선비들의 태도는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노비제가 조선시대의 신분제, 나아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관건이라 본다. 학계에서는 노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논쟁이 있어 왔지만 아직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며 “신분이라는 것이 지극히 법률적인 개념인데도 노비의 법적 성격에 대해 거의 외면한 채 진행된 것은 따져 볼 여지가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송에서도 당사자능력이나 소송능력이 양반이나 상민과 구별 없이 인정되어, 자신의 소송을 수행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상전의 소송을 대송하는 등 소송대리권도 있었다. 로마의 노예가 자신의 소송은 물론 타인의 소송조차 수행할 수 없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노비의 성격을 달리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설명하며 노비제에 대해 학계의 총체적인 논의를 제의한다.
이 책의 서사가 되는 이지도ㆍ다물사리 판결문서는 안동의 학봉 김성일 종택에서 소장한 수많은 고문서 사이에 있었다. 5건의 문서들이 연원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발급연대를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의성 김씨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간지, 연호, 인물들의 나이, 지명, 판결한 이의 서명, 분쟁 사항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대조해 나가자 매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다섯 건의 결송입안이 모두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재직했던 시기에 처리한 판결문이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민사소송과 소송이론의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발굴한 이 판결문들과 『경북고문서집성』 등에서 수집된 결송입안들, 개인 문집 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이 책을 쓴 뒤 머리말에서 “소설처럼 읽히길 바랐지만 픽션은 아니기에 모든 글월과 낱말이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재삼 검토하면서 진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임상혁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사, 같은 대학 대학원 법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근무했다. 현재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민사소송법의 해석론과 함께 그 성립 연혁에 주의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역사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의 역할에 관심을 쏟고 있다. 「법원의 ADR」, 「개정 민사소송법에서 전자문서의 개념과 증명력」, 「거창사건 관련 판결과 소멸시효 항변」, 「소송 기피의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와 한국사회」, 「조선전기 민사소송과 소송이론의 전개」 등의 글들이 있다.
▣ 주요 목차
1장 1586년 노비소송 “나는 노비로소이다”
법정의 모습 ― 선조 19년 나주관아 / 원님재판 / 결송입안과 문서생활 / 1586년 이지도·다물사리 판결문 / 송관 김성일 / 올곧은 법관의 수난 / 부임과 파직 / 관할과 상피
칼럼1_명판결의 한 사례
2장 또다른 노비소송 “나는 양인이로소이다”
허관손의 상언 / 천처첩자녀가 양인이 되는 길 / 유희춘의 자녀들 / 얼녀 네 명이 모두 양인이 되다 / 임금에게까지 호소하다 / 황새 결송 / 심급제도 / 삼도득신법의 등장 / 삼도득신법에 대한 반발
3장 법에 따라 심리한다
소송의 비롯 / 민사소송과 형사소송 / 공문서와 이두 / 아전 / 향리의 역할 / 법 적용을 다투다 / 소송법서 / 『사송유취』 / 실체법과 절차법 / 수교와 법전
칼럼2_재판과 조정
4장 진실을 찾아서
나주법정에 이르다 / 원고 “다물사리는 양인입니다!” / 피고 “저는 노비이옵니다!” / 신분과 성명 / 증거조사 / 호적 상고 / 압량위천과 암록 / 조사 결과와 증인 신문 / 투탁 / 공천과 사천 / 다물사리, 착명을 거부하다 / 도장 / 추정소지
5장 재판과 사회
원고와 피고의 변론이 종결되다 / 판결이 내려지다 / 사건의 전모 / 구지의 작전 / 이지도의 사정 / 반전 / 분쟁과 재판 / 노비제사회 / 소송비용 / 판결의 증명 / 소송과 권리 실현 / 소송과 법제
칼럼3_소송을 꺼리는 문화적 전통
부록
1) 1517년 노비결송입안-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 소장
2) 이지도 판결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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