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바이러스 이전에 세균과의 전쟁이 있었다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를 둘러싼
국가, 의약 회사, 의학자들의 분투를 유려하게 엮어내다
바이러스 이전에 세균이 있었다,
총탄보다 큰 위협이었던 세균 감염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멈춰 세웠다. 2020년 들어 인류는 문명과 사회 시스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첨단 기술로 무장한 인류가 너무도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다. 그런데 100년 전만 해도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그 당시 인류의 적은 세균이었다. 『감염의 전장에서』 저자인 토머스 헤이거는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부모는 어릴 적에 귓병에 걸리면 침대에 누워 진통제와 동정심으로 치료받았지만, 나는 어릴 적 귓병에 걸렸을 때 항생제를 먹었다. 감기가 기관지염으로 번지면 우리 부모는 침대에 더 오래 누워 있고 더 극진히 간호를 받았지만, 나는 항생제를 더 먹었다. 우리 부모 세대는 어릴 적에 연쇄구균 인두염, 베인 상처의 감염, 성홍열, 수막염, 폐렴을 비롯한 수많은 감염병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죽는 일도 많았다. 나와 학교 친구들이 살아남은 것은 항생제 덕분이다.
100년 전만 해도 지금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감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상황은 전쟁터에서 가장 심각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상처 감염으로 병사 수십만 명이 죽었는데, 이는 적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병사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의대에 다니다가 독일군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맡는다. 1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던 동안 수많은 부상병과 수술 장면을 목격한 도마크는 “이런 상황에서 대수술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감염 없이 해내 환자가 상처 감염으로 죽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를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심술궂고 비겁하게 사람을 살해하는 이 지독한 적”인 세균에 맞추며 다짐한다. “나는 이 파멸적인 광기에 맞서겠노라고 신과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훗날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를 발명한다.
세균과의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낸 설파제,
설파제 발명을 둘러싼 또 다른 전장을 조명하다
도마크는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를 발명하고 노벨상까지 받는 이 이야기의 주역이지만, 이 책은 도마크의 행적만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세균 감염이 당시 과학자와 의학자들에게 어떤 위협이었는지,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국가와 거대 제약회사는 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일단 파스퇴르의 연구 덕분에,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병균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발상을 하기 어려웠다. 코흐의 연구를 통해 각각 다른 세균이 디프테리아, 결핵, 탄저병, 폐렴, 파상풍, 콜레라 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지만 질병이 세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알아내는 것과 세균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영국의 의학자 암로스 경은 세균 자체를 박멸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감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상하거나 괴사한 조직에서 병균이 번성하니 문제가 될 부위를 과감하게 절단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특정한 병원균을 공략해서 없앤다는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 의사들이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환자가 세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염되었다면 인체가 그 감염과 싸워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에서는 발명만 한다면 대박을 낼 수 있는 ‘마법 탄환(Zauberkugel)’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에 착수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유기체와 세균에만 작용해 환자의 몸속에서 안전하게 감염을 막아낼 수 있는 약물 개발에 나선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약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마법 탄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몽상가들의 꿈이 결실을 보게 된 셈이다.
설파제가 발명된 후에는 설파제 사용과 유통, 특허권 등을 둘러싸고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다양한 논란이 일었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이 만든 설파제를, 영국의 권위 있는 의학자가 대규모 시험을 해서 효능을 인정하고,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는 작용 기전을 밝힌다. 미국에서는 각종 카피약이 판매되다가 부작용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다. 하나의 약이 발명되고 상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과 맥락이 교차된다. 그리고 그 약은 세상을 바꾼다.
세균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인간의 삶과 의학에서 일어난 변화
연쇄구균이 일으키는 다양한 세균 감염에서 설파제는 놀라운 효능을 보여준다. 설파제가 보급되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대표적인 것이 산욕열로 인한 산모 사망이다. 산욕열은 병원에서 출산하는 많은 산모를 희생시켰다. 산욕열이 유행한 운 나쁜 해에는 감염된 산모 네 명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산욕열의 원인이 연쇄구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산욕열 감염의 3분의 2가 ‘무증상 보균자’인 의료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된다. 병원에 수많은 무증상 보균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무증상 보균자를 차단하는 다양한 노력을 한 끝에 산욕열 발병률을 낮게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간헐적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에서 설파제가 개발되고 나서 얼마 후 영국에 소개되는데, 때마침 이 약은 영국의 산욕열 연구를 이끈 레너드 콜브룩의 손에 들어간다. 그는 조심스럽게 환자들에게 설파제를 투약하다가 어느 정도 효과가 드러나자 산욕열에 걸린 환자들에게 대규모로 설파제를 처방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당시 세계 최고 시설을 갖춘 그의 병원에서 산욕열로 치료를 받던 산모 네 명 중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설파제를 투입한 이후 산욕열 환자 64명 가운데 61명이 생존하는 결과를 얻는다. 사망률을 20~30퍼센트에서 4.7퍼센트로 낮춘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었다. 산욕열 외에도 성홍열, 신우염, 수막염, 가스괴저, 중이염, 편도염 치료에서 설파제는 효과가 있었다. 그야말로 ‘기적의 약품’이 등장한 것이다.
설파제는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의사와 병원의 역할을 뒤바꿨다. 항생제 덕에 병원은 환자에게 더 안전한 곳이 되었으며, 주류 의과대학과 병원 사이에는 가장 강력한 약물을 가장 숙련된 의사와 결합해 가장 발전하고 위생적인 돌봄 환경에서 시술하는 동맹이 결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대다수 의료 행위가 환자의 집에서 행해졌다. 병원에서 전업으로 일하는 의사는 16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분만의 절반은 가정 분만이었다. 1930년의 평균적 개업의는 일주일에 약 50명의 환자를 보았다. 하지만 1950년이 되자 평균적 의사들은 더 빠르고 강력한 도구로 무장한 채 일주일에 두 배나 되는 환자를 보았으며 그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왕진 제도는 멸종하다시피 했다. 분만의 90퍼센트 이상이 병원에서 시술되며, 대다수 의사가 일을 하는 곳은 병원과 병원 관련 사무실이다. 일반적으로 1930년대 이전의 의료인과 비교할 때, 오늘날의 의사들은 더 훌륭한 훈련을 받고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환자에게 투약할 의약품을 더 철저히 통제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에 훨씬 효과적이고 훨씬 서두르고, 그리고 훨씬 부유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설파제 또는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왠지 낯설지 않은 100년 전 상황,
공중보건과 의학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다
1년 전이었다면, 이 책에서 소개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황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책에서 묘사하는 풍경이 왠지 익숙하게 보인다. 이 책에서는 설파제가 바꾼, 국가가 질병을 통제하는 양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설파제와 그 이후의 항생제가 등장하면서 국가가 질병 통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1890년과 1930년 사이의 시기는 공중보건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이때의 의료인들은 병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환자가 감염되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유일한 해법은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물, 음식, 하수도의 질을 개량하고, 기본적 위생을 증진하고, 예방 접종을 하기 위해 매우 효과적인 사업들이 개발되고 추진되었다. 이 사업들은 설파제 이전에 질병 발병률을 낮추는 데 놀라운 성과를 냈다. 그런데 1930년 이후로는 제한된 의료 자금이 점차 공중보건 조치에서 빠져나가 신약과 의료 신기술에 흘러들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설파제 및 항생제가 보급되면서 국가의 역할은 감염 예방에서 의료 신기술 개발로 옮겨갔다. 이건 기본적인 공중보건 요건이 어느 정도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료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의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국가의 역할은 다시금 예방과 공중보건 강화, 방역에 맞춰졌다. 감염병의 치료제를 찾지 못하면 예방에 힘을 기울이다가, 치료제를 찾고 나면 훗날 다른 감염병이 나타나는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설파제는 감염과의 전투에서 인간을 ‘치료’한 최초의 약물이지만, 감염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치료제를 만들더라도 새로운 병이 나타날 테고, 우리는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대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헤이거는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역사 속에 감춰져 있던 설파제 발명의 뒷이야기들을 캐냈다. 그리고 흥미롭고도 유려하고도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병원이나 의약품 개발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질 것이다. 손을 뗄 수 없는 스토리텔링은 과학 연구의 현장을 밀도 있게 묘사하면서도 시대적인 맥락을 함께 제시하는 웰메이드 과학책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준 높은 과학?역사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만족할 것이다. 노승영 번역가의 섬세하면서 깔끔한 번역도 언제나처럼 믿을 만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토머스 헤이거
과학·의학 분야의 베테랑 저술가로, 『공기의 연금술』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냈으며,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메디컬 트리뷴》을 비롯한 다양한 잡지에 기고했다. 오리건대학교 출판부 부장을 지냈으며 《아메리칸 헬스》 편집위원이자 《미국의학협회 저널》 필진이다. 현재 오리건주 유진에 산다.
옮긴이 :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박산호 번역가와 함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바나나 제국의 몰락』, 『트랜스휴머니즘』, 『나무의 노래』, 『노르웨이의 나무』, 『정치의 도덕적 기초』, 『그림자 노동』,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홈페이지(http://socoop.net)에서 그동안 작업한 책들에 대한 정보와 정오표를 볼 수 있다.
목 차
감사의 글
서문
들어가며
1부 사냥
2부 오른쪽
3부 왼쪽
나가며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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