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17회 - " 소귀에 경 읽을 때는 소의 입장도 헤아리자 "

영광도서 0 590


해는 중천에 떠 있다. 농부가 소의 귀에 대고 중얼거린다. 보기 드문 장면이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카메라를 들고 다가간다. 그의 손엔 경전이 들려 있다. 못 참고 끼어든다. “죄송하지만 뭐 하시는 거죠?” 농부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하다. “보면 모르겠소? 소 잘 크라고 좋은 말씀 들려주고 있지 않소?” 마음은 알겠는데 방법이 좀 그렇다. “소가 알아들을까요?” “정성이 갸륵하면 통하지 않겠소?” 농부의 근심보다 소의 처지가 더 안쓰러워 보인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을 마치 소의 잘못인 양 해석하는 건 부당하다. 그래서 소의 ‘변호인’인 내가 꾸며낸 우화다. 소통이다, 불통이다 말이 나올라치면 옛날 그림이 몇 장 떠오른다. 교무실에 불려간 학생이 쭈그리고 앉아 꾸지람을 듣는다. 소리가 커진다. 옆 반 담임이 거든다. “그만하세요. 소귀에 경 읽기라니까요.” 듣는 학생은 혼란스럽다. “지금 저분은 소를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소귀에 경 읽는 분을 나무란 것인가.”

분을 삭이지 못하면 입에서 거품이 난다. “말이 통해야 말이죠.” 말이 아니라 마음이 안 통하는 거다. 그럴 때야말로 침묵이 금이다. 침묵하는 시간은 머리를 비워두는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에 전후좌우 생각을 가다듬어야 금이 빛을 발한다. 솔직해지자.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건가, 미워하는 건가.

사랑한다면 위치를 바꿔서 보자. 위에서 보면 땅만 보인다. 내 눈에 들어온 것 기준으로만 쏟아낸다면 바닥은 많이 더럽다. 깨끗이 하고 살라는 말. 과연 그를 아껴서 한 말인가. 실은 자기 자신을 두둔한 거다. 모름지기 사랑은 그대가 준 그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받은 그것이다. 만약 미움의 감정이 복받친다면 지금은 입을 닫아라. 굳이 말로 쏘아대지 마라. 그건 재앙이다. 지혜는 행복의 총량을 헤아릴 줄 아는 계산에서 출발한다. 미움의 화살은 독을 묻히고 내게 반드시 돌아온다. 불행한 미래를 예약까지 해둘 필요가 있는가.

언제나 최악은 사랑의 가면을 뒤집어쓴 미움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러면서 소란을 떤다. 우직한 소도 농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는 짐작할 것이다. 그래서 온순한 소는 밭 갈다 말고 한참이나 인내의 시간을 가졌을 거다.

소통의 요체는 사랑과 지혜다. 경 읽는 농부는 사랑이 지혜를 다소 앞질렀다. 지혜는 있는데 사랑이 없는 경우는 또 어떤가. 그들은 대체로 경쟁의 관계다. 이럴 땐 오히려 발전(발상 전환을 줄인 말)의 기회로 활용하자. 경쟁자는 나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소통이 안 될 때는 두 가지 중 하나가 미흡한 거다. 소와 통하려면 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자. 세상의 소음도 약간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2014.1.20. 중앙일보 분수대 - 주철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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