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23회 - " 산수유꽃 피는 남도의 산야 … 바로 여기가 봄이더라 "

영광도서 0 624


오래도록 묻어두고 살았던 낱말을 시방 꺼낸다. 봄. 한 번 불렀더니 성이 안 찬다. 너무 오래 기다린 모양이다. 김유정은 연달아 두 번 불렀다지? 그럼 나는 내리 세 번을 부른다. 봄, 봄, 봄.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그래, 봄이다. 아무나 붙잡고 ‘고맙다’고 인사하고픈 봄이다. 아침 햇살 아래 물오른 버들강아지가 고맙고, 언 땅 비집고 고개 내민 변산바람꽃이 고맙고,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붉은 흙이 고맙다. 마침내 소생한 만물이 고맙고, 기어코 돌아온 봄이 고맙다. 고마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맘때만 되면 여행기자는 몸살을 앓는다. 몸은 회색 도시에 갇혀 살아도, 마음은 노란 기운 자욱한 남도 들녘에 벌써 가 있다. 지리산 남쪽 자락 양지바른 산골마을의 어느 돌담길 모퉁이에서 서성대고 있다.

 봄은 산수유꽃이 피어야 비로소 시작한다. 메마른 가지에서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려야 겨울잠 자던 산하가 기지개를 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몇 해 전 이맘때 지리산 기슭 산동마을의 이른 아침을 여태 잊지 못해서다.

 산 아래 마을이 온통 노랗게 빛나는 장면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마을을 감도는 노랑은 색(色)이라기보다 어떠한 기운이었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오면 노란 기운은 어지러이 흔들렸다. 노랑이 땅에 스미고 하늘에 번져 세상의 윤곽을 지웠다. 잡히지 않는 색이어서 아른한 꿈 같은 색이었다. 산수유꽃은 아스라이, 아지랑이처럼 몽개몽개 피어올랐다. 여기에 봄이 있었다. 여기가 봄이었다.

 산수유처럼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는 식물은 죄 꽃송이가 잘다. 하도 잘아서 혼자선 벌과 나비를 부를 수 없어 송이송이 힘을 합친다. 노란 겉꽃잎이 먼저 벌어지고, 겉꽃 안에서 노란 속꽃잎 수십 장이 폭죽처럼 열린다. 그렇게 산수유꽃은 두 번, 무더기로 피어난다. 산수유꽃이 목련처럼 한 송이 꽃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노랗고 환한 기운으로만 남는 까닭이다. 작고 여릴수록 모여야 한다는 이치를 산수유도 아는 것이다.

 산수유꽃을 본 적 없어도 산수유 열매는 익숙하다. 어떤 아저씨가 TV에 나와 “남자한테 참 좋은데” 타령을 했던 신비의 영약도, 열병 앓는 자식 살리겠다고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김종길, ‘성탄제’ 부분) 그 붉은 열매도 산수유 열매다. 산수유 열매를 약으로 쓰려면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만 한 열매를 까서 씨를 발라야 한다. 산수유꽃 피는 마을 아낙의 손가락에는 마디마디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다.

 지상의 모든 꽃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핀다. 환한 봄날 같은 산수유꽃도 시린 사연 품고 피었다 진다. 남도에서 샛노란 방신(芳信)이 꼬무락꼬무락 올라오는 요즘이다. 봄이다. 꽃 피는 봄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2014.3.5. 분수대 -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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