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38회 - " 옛길에서 길을 찾다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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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7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길은 역시 문경새재다. 새재는 한자로 ‘조령(鳥嶺)’이라 하는데,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을 품고 있다. 높은 하늘을 나는 새조차 넘기 힘든 고개이니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에게는 정말 험준한 고개다. 그럼에도 이 가파른 새재를 넘어야 하는 이유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최단거리로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한양과 동래를 잇는, 조선의 주요 대로인 영남대로도 여기를 통과하므로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 길을 넘어야 했다.
진도 아리랑을 들을 때마다 궁금증이 불쑥 올라온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남도민요인 진도아리랑의 첫 소절에서 경상도 고개를 노래하고 있으니 문경새재는 웬 고개란 말인가. 이를 두고 수많은 ‘전설 따라 삼천리’가 펼쳐지지만 솔깃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차라리 문경새재 남쪽에 있는 벼랑길인 ‘토끼비리’를 보는 게 낫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반들반들해진 이 바윗길은 문경새재가 단지 발품을 줄이는 고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개척한 역사의 옛길임을 말해준다.
다산 정약용도 문경새재의 벼랑길을 지나간 듯하다. 그는 ‘새재를 넘으며’란 시에서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은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라고 읊었다. 장인 홍화보가 조령관 수비를 담당할 때 정약용은 부인 홍씨뿐만 아니라 부친을 모시고 문경을 왕래했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은 새재에 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약용 외에도 내로라하는 조선의 문사들이 남긴 새재에 관한 시가 줄잡아 370편에 달한다고 한다. 험난한 새재를 걸으면서도 시인이 된 선비들은 아름다운 시상을 풀어냈다.
수천 년 동안 민족이 걸었던 옛길이건만 근대시기에 말 못할 서러움을 당했다. 일제가 군국주의의 실현을 위해 부설한 경부선은 우리의 옛길을 어두운 터널로 밀어붙였다. 우리나라를 일일생활권으로 묶어준 경부고속도로도 빠른 속도로 옛길을 밀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철도와 고속도로가 조선의 도로 위에 그대로 놓임에 따라 옛길은 잠식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자연과 사람보다는 근대화가 먼저였던 시기에 민족이 걸어온 옛길은 벼랑에서 추락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행히 1970년대부터 옛길 연구에 헌신한 지리학자들의 노력 덕에 기록으로나마 추정이 가능해졌다.
웰빙 시대가 오자 옛길에도 훈풍이 불었다. 건강한 삶과 생활의 여유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우리의 옛길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오직 직선으로 뻗은 근대의 도로는 산허리를 자르고, 고개를 뚫고 달려갔지만 우리의 옛길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을 보듬고 돌고 도는 옛길은 산을 만나면 넘는 여유가 있고, 강을 마주치면 우회하는 아량이 있었다. 우리의 산하를 배제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꼭 껴안은 채로 오랜 세월 굽이굽이 이어져 왔다. 옛길이 웰빙을 넘어 힐링을 가져다준 것도 이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뒤돌아볼 여유가 없지만, 고즈넉한 옛길에서는 어디서든 돌아보고 멈추어 쉴 수도 있다. 내가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은 옛길 위에서 가능하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다면 이제 옛길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한다.
옛길에서 길을 찾는 것은 비단 개인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 길은 무한한 문화콘텐트를 보관하고 있는 역사의 보물창고였다. 일례로 영남대로는 영남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걸었던 과거 길이자 한양에서 임명장을 받은 관리들이 내려오던 부임길이었다.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사행(使行)길이었으며,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는 보부상들에게는 시장 길이었다. 이렇게 옛길 위에 행인들이 남긴 발자국만큼 역사의 콘텐트들도 쌓여 있으니 우리 문화를 보려면 옛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내에는 옛길의 문화를 조명한 옛길박물관이 있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이 작은 박물관에 연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강소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는 옛길에서 길을 찾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중앙일보 2014.6.7 삶의 향기 -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진도 아리랑을 들을 때마다 궁금증이 불쑥 올라온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남도민요인 진도아리랑의 첫 소절에서 경상도 고개를 노래하고 있으니 문경새재는 웬 고개란 말인가. 이를 두고 수많은 ‘전설 따라 삼천리’가 펼쳐지지만 솔깃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차라리 문경새재 남쪽에 있는 벼랑길인 ‘토끼비리’를 보는 게 낫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반들반들해진 이 바윗길은 문경새재가 단지 발품을 줄이는 고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개척한 역사의 옛길임을 말해준다.
다산 정약용도 문경새재의 벼랑길을 지나간 듯하다. 그는 ‘새재를 넘으며’란 시에서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은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라고 읊었다. 장인 홍화보가 조령관 수비를 담당할 때 정약용은 부인 홍씨뿐만 아니라 부친을 모시고 문경을 왕래했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은 새재에 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약용 외에도 내로라하는 조선의 문사들이 남긴 새재에 관한 시가 줄잡아 370편에 달한다고 한다. 험난한 새재를 걸으면서도 시인이 된 선비들은 아름다운 시상을 풀어냈다.
수천 년 동안 민족이 걸었던 옛길이건만 근대시기에 말 못할 서러움을 당했다. 일제가 군국주의의 실현을 위해 부설한 경부선은 우리의 옛길을 어두운 터널로 밀어붙였다. 우리나라를 일일생활권으로 묶어준 경부고속도로도 빠른 속도로 옛길을 밀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철도와 고속도로가 조선의 도로 위에 그대로 놓임에 따라 옛길은 잠식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자연과 사람보다는 근대화가 먼저였던 시기에 민족이 걸어온 옛길은 벼랑에서 추락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행히 1970년대부터 옛길 연구에 헌신한 지리학자들의 노력 덕에 기록으로나마 추정이 가능해졌다.
웰빙 시대가 오자 옛길에도 훈풍이 불었다. 건강한 삶과 생활의 여유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우리의 옛길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오직 직선으로 뻗은 근대의 도로는 산허리를 자르고, 고개를 뚫고 달려갔지만 우리의 옛길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을 보듬고 돌고 도는 옛길은 산을 만나면 넘는 여유가 있고, 강을 마주치면 우회하는 아량이 있었다. 우리의 산하를 배제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꼭 껴안은 채로 오랜 세월 굽이굽이 이어져 왔다. 옛길이 웰빙을 넘어 힐링을 가져다준 것도 이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뒤돌아볼 여유가 없지만, 고즈넉한 옛길에서는 어디서든 돌아보고 멈추어 쉴 수도 있다. 내가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은 옛길 위에서 가능하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다면 이제 옛길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한다.
옛길에서 길을 찾는 것은 비단 개인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 길은 무한한 문화콘텐트를 보관하고 있는 역사의 보물창고였다. 일례로 영남대로는 영남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걸었던 과거 길이자 한양에서 임명장을 받은 관리들이 내려오던 부임길이었다.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사행(使行)길이었으며,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는 보부상들에게는 시장 길이었다. 이렇게 옛길 위에 행인들이 남긴 발자국만큼 역사의 콘텐트들도 쌓여 있으니 우리 문화를 보려면 옛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내에는 옛길의 문화를 조명한 옛길박물관이 있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이 작은 박물관에 연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강소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는 옛길에서 길을 찾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중앙일보 2014.6.7 삶의 향기 -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