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57회 - " 독서의 반감기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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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7
전 세계에 『성경』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라고 한다. 서양어로도 80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을 만큼 동서를 막론한 고전이다. 2500여 년 전에 성립된 책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독자에게 읽혀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한편으로 『도덕경』은 가장 많이 오독된 책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분량은 5000여 자에 불과하지만 노자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경』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기』에 ‘노자열전’을 쓴 사마천조차도 노자로부터 400년 후대의 인물이고, 가장 강력한 주석본을 펴낸 삼국시대 위나라의 왕필도 무려 1000년 뒤의 사람이다. 통상 왕필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행본’으로 읽히지만 1973년 중국 후난성 마왕퇴 고분에서 출토된 백서본만 하더라도 순서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현재로선 『도덕경』의 원형을 가장 충실히 보존하고 있는 걸로 평가되는 백서본을 왕필은 참고할 수 없었으니 그의 견해만 신주 모시듯 따르는 것은 결코 상책이 되기 어렵다.
중문학자 문성재의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이란 책을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처음부터 새로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가령 이런 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덕경』의 첫 대목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부터 보자. 백서본을 포함한 춘추전국시대의 판본에는 ‘비상도’가 ‘비항도(非恒道)’라고 나온다. ‘항(恒)’자가 ‘상(常)’자로 바뀐 것인데, 이는 한나라의 제3대 황제 효문제 유항(劉恒)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필의 통행본에도 ‘상’자만 등장하지 ‘항’자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뜻의 단어이긴 하지만 ‘상’이 특정 대상의 불변성을 가리킨다면 ‘항’은 그 영속성에 방점이 놓인다고 한다. 왕필 이래로 ‘도가도 비상도’를 흔히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풀이해 온 것은 혹 이러한 차이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닐까.
문성재는 통상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가도 비항도’를 “도는 법도 삼아 따를 수는 있어도 영원한 도인 것은 아니다”라고 새롭게 풀이한다. ‘도’를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나 법도란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불교식으론 ‘법(法)’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는 견해다. 사실 이 구절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도에 관한 노자의 모든 언명이 논리상 모순적이게 된다. 『도덕경』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놓은 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에 기대면, 노자는 언어가 ‘영원한 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경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지혜를 설파한 게 된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타당하다면 우리가 읽어온 『도덕경』의 3분의 1 이상을 다시 고쳐 읽어야 한다. 어쩌면 노자와 『도덕경』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을 폐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잘 안다고 생각해 온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면 좀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지식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붕괴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의당 지식에도 적용된다. 가령 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체세포에 들어 있는 염색체 수가 48개라는 게 정설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중학생만 되더라도 그 수가 46개라고 배운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지식의 누적이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지식의 반감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쓸모 있는 지식으로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면 더 이상 지식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게 된다. 정보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물리학에서 반감기는 10년 정도였다. 더 하위 분야로 내려가면 원자핵물리학은 5.1년, 플라스마물리학은 5.4년이 반감기였다. 새로운 논문이라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인용되지 않아 낡은 논문으로 폐기된다는 뜻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옛날에 읽어봤지”라는 무용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서의 반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새로 읽을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독서 또한 녹록지 않다.
[중앙일보 2014.9.30 삶의 향기 - 이현우 북칼럼리스트]
거슬러 올라가면 『사기』에 ‘노자열전’을 쓴 사마천조차도 노자로부터 400년 후대의 인물이고, 가장 강력한 주석본을 펴낸 삼국시대 위나라의 왕필도 무려 1000년 뒤의 사람이다. 통상 왕필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행본’으로 읽히지만 1973년 중국 후난성 마왕퇴 고분에서 출토된 백서본만 하더라도 순서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현재로선 『도덕경』의 원형을 가장 충실히 보존하고 있는 걸로 평가되는 백서본을 왕필은 참고할 수 없었으니 그의 견해만 신주 모시듯 따르는 것은 결코 상책이 되기 어렵다.
중문학자 문성재의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이란 책을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처음부터 새로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가령 이런 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덕경』의 첫 대목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부터 보자. 백서본을 포함한 춘추전국시대의 판본에는 ‘비상도’가 ‘비항도(非恒道)’라고 나온다. ‘항(恒)’자가 ‘상(常)’자로 바뀐 것인데, 이는 한나라의 제3대 황제 효문제 유항(劉恒)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필의 통행본에도 ‘상’자만 등장하지 ‘항’자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뜻의 단어이긴 하지만 ‘상’이 특정 대상의 불변성을 가리킨다면 ‘항’은 그 영속성에 방점이 놓인다고 한다. 왕필 이래로 ‘도가도 비상도’를 흔히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풀이해 온 것은 혹 이러한 차이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닐까.
문성재는 통상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가도 비항도’를 “도는 법도 삼아 따를 수는 있어도 영원한 도인 것은 아니다”라고 새롭게 풀이한다. ‘도’를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나 법도란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불교식으론 ‘법(法)’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는 견해다. 사실 이 구절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도에 관한 노자의 모든 언명이 논리상 모순적이게 된다. 『도덕경』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놓은 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에 기대면, 노자는 언어가 ‘영원한 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경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지혜를 설파한 게 된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타당하다면 우리가 읽어온 『도덕경』의 3분의 1 이상을 다시 고쳐 읽어야 한다. 어쩌면 노자와 『도덕경』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을 폐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잘 안다고 생각해 온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면 좀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지식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붕괴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의당 지식에도 적용된다. 가령 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체세포에 들어 있는 염색체 수가 48개라는 게 정설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중학생만 되더라도 그 수가 46개라고 배운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지식의 누적이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지식의 반감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쓸모 있는 지식으로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면 더 이상 지식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게 된다. 정보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물리학에서 반감기는 10년 정도였다. 더 하위 분야로 내려가면 원자핵물리학은 5.1년, 플라스마물리학은 5.4년이 반감기였다. 새로운 논문이라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인용되지 않아 낡은 논문으로 폐기된다는 뜻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옛날에 읽어봤지”라는 무용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서의 반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새로 읽을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독서 또한 녹록지 않다.
[중앙일보 2014.9.30 삶의 향기 - 이현우 북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