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65회 - " 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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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산석(山夕)에게.
이런 문문한 글월을 자네한테 보내는 일이 처음이네. 너무 늦은 처음이겠네.
불현듯이 이 새해 벽두에 자네 생각이 난 것은 그동안의 무미건조한 내 무심을 뉘우친 나머지이기도 할 것이네.
하지만 자주 너나들이로 만난다 해서 그것이 삶의 논밭을 기름지게 한다는 법도 따로 없을 것이네.
동네 개들이 처음에 만날 때는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조금 뒤에는 어제 오늘 내일 없이 그냥 심드렁한 일상이고 말지 않던가.
지난해나 지지난해나 이른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여기서 만나고 저기서 만나는 허울 좋은 의제 운운으로 합의한 번드르르한 사항들은 다 오락의 수준 아니던가.
이런 만남의 소비행위보다는 한평생 합계로 따져보아도 대여섯 차례뿐인 이 지상에서의 해후(邂逅)야말로 만남의 철리(哲理)가 새삼 넘쳐날 것이네.
몇 해 만에, 몇 10년 만에 자네와 내가 만나는 자리에서 그 이론의 여지없는 환희의 취흥이 일어나는 것도 오랜 두절 때문인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언젠가 자네더러 ‘우리 한번 사무치자!’라고 지껄인 적이 있었네. 그런 둘 사이의 주술(呪術)이 있어야겠네.
내가 알고 지내는 오랜 인연의 벗 하나가 있네. 지난날 중학교 시절 기차통학을 했는데 그 기차 꽁지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장난질을 하다가 추락사고를 냈어. 즉사했어. 그런데 유체이탈로 자신의 혼백이 공중부양하는 중에 필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철로에 죽어있는 자신의 몸과 거기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네.
그래서 저 아래 내 몸뚱이한테 내려가야지 하고 버둥댄 끝에 다시 자신의 피범벅 몸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야속한 생존 진행이야말로 우리네 심신에 치명적인 유체이탈인 자아상실을 초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만남이란 것이 지극히 사무적이거나 이 물품, 저 물품의 거래관계거나 한 현실도 삶의 숭고성과는 먼 노릇이 아닌가.
세월은 백대(百代)의 길손이라 노래한 저 고대의 길손 이백(李白)은 나에게는 당대의 근친(近親) 이백이기도 하네.
한 해를 아픔으로 여의고 한 해를 또 다른 아픔으로 낳은 우리들의 새해 안부로 자네의 자취나 내 자취의 공간을 지나가는 이 시간의 동정(動靜)에 잠겨보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 있네.
이런 감회로도 나 역시 시간에 어김없이 종속된 것을 드러내기도 하겠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절정을 체험할 때가 있네. 가령 60여 년의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한동안에는 거기에 시간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의 비경(秘境)’이 왜 없겠는가.
아니, 한 쌍 연인의 밀회야말로 시간이고 뭐고 전혀 끼어들 수 없지 않은가.
한 물리학자가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 행복은 같은 시간을 짧게 만들고 불행은 길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류의 정착시대 이래, 시간을 깨달은 이래 시간을 인간의 것으로 삼아온 지 오래이네. 지난 세기 상반기 ‘존재와 시간’이 탐구되었고 그 뒤로도 더 많은 시간의 해체탐구가 이어지고 있네.
저 고대 인도의 숱한 사상 밀림을 대충 요약할 때 13대 사상으로 말하더군. 그 가운데에서 ‘시도(時道)’는 시간이 만물의 근본이고 그 만물에는 상주불변의 본체가 들어있다고 했더군.
이것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다, 불이다, 바람이다, 수(數)다 하는 그리스 자연철학과도 어금버금이겠네.
불교는 이런 것들을 한갓 외도(外道)하고 낮추는 한편 저 우주적인 시간의 그 무시간적인 겁(劫)의 세계로부터 극소 찰나에 걸친 초시간, 초공간을 끝도 없이 드넓히고 좁히고 있네.
이런 시간들은 기원전이다 기원이다 하는 서구 중세 시대 구분이나 그 밖의 연월일 따위로는 도저히 어림잡을 수 없네. 이른바 개자겁(芥子劫) 반석겁(盤石劫) 삼천진겁(三千塵劫)은 또 무엇인가. 5000만억 나유타 이승지겁의 삼천대천세계를 부수고 부수어 티끌을 만드는 그 시간의 무한대를 누가 시간이라 하겠는가.
이런 판국에서 우리는 시간의 의미를 꾀죄죄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네. 우주의 한 점이라 할 이 태양계의 푸른 행성 위에서 그것을 회색행성으로 만들어가며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영역을 탈취하는 문명 속에서 시간은 그 욕망의 도구가 되고 말았네.
이렇게 우리가 1년이나 2월이나 3일이나 4시나 4시 반 없이 살 수 있겠는가. 이런 생존의 절대시간을 소유함으로써 그 시간의 태초 광겁의 공공성을 도리어 백일몽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네와의 만남도 비애의 만남이기 십상이겠네.
우리가 이어오는 현대야말로 시간을 모독하고 시간을 자아의 맹목으로 채우는 어리석음에서 얼마나 벗어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만남이라는 정신의 최고 형태인 위대한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시간의 간극은 우주의 어디에만 있지 않네. 우리들의 팍팍한 무정세월이도 있네. 이런 간극 사이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아슬아슬한 가치는 우애 이것 아닌가. 우애야말로 이 지상 최상의 정치이자 시 아닌가.
자네의 휑한 눈의 적광(寂光)이 사뭇 그립네.
고 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