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76회 - " 번역 읽기의 즐거움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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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소설 번역이 생업이 된 지 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사실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나의 번역 기질이 그 당시 대세를 이루던 방식과 잘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그 무렵 많은 사람이 선호하던 것은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이었다. 즉 번역의 냄새가 나지 않는 번역으로, 이 때문에 당시 번역서 편집자가 하는 주된 업무는 번역 원고를 갈고닦아 번역의 흔적을 지우는 ‘윤문’이었다. 따라서 그런 수고를 덜 수 있도록 처음부터 매끄럽게 다듬어진 번역이 모범적인 것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나는 매끄럽게 다듬어낼 능력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갈고 다듬을 때 갈려 나가는 원문의 거칠고 모난 부분들이 아깝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번역을 하되 번역 같지 않게 해야 한다는 자기 부정의 오묘한 경지 또한 나처럼 단순한 인간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내가 타협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문화가 풍성해지면서 번역의 추세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소수 의견이었을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매끄러운 번역이 끝까지 가면 원문의 모든 설정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놓는 번안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도 번역 같지 않은 번역에 대한 요구의 뿌리에는 번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하는 조중환의 『장한몽』(1913)이 일본의 오자키 고요의 『곤지키야샤(金色夜叉)』(1899)의 번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인데(이 일본 소설 또한 미국 소설의 번안이라고 한다), 만일 『장한몽』이 번안이 아니라 그 일본 작품의 번역이었다면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뒤집어 말하면 외국 소설도 상품이 되는 순간 최대의 판매를 위해서는 ‘현지화 전략’이라는 요구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베스트셀러가 될 법하지 않은 고전 소설이 꽤 많이 팔린 적이 있는데, 독자가 팽창하는 시점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 등장인물 이름을 원래 이름과 애칭 두 가지로(가령 윌리엄과 빌로) 혼용하여 헛갈리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럴 때 판매자가 고객을 가르치려 들기는 쉽지 않다. 독자가 늘어나는 순간, 또는 독자를 늘리려는 순간 현지 독자의 편의는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번안에서 상업적 고려가 전부인 것은 아니다. 『장한몽』이 그 시기 수많은 번안물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한 외래문화가 밀려오는 시기에는 이질적 요소를 최대한 제거해 내려는 번안적 충동이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 번안이 번역으로 바뀔 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아마 외국인인 존과 메리가 한국말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지만, 순진한 아이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번역된 소설은 애초에 허구인 소설을 더욱더 현실 같지 않은 설정 속에 집어넣는 복잡한 게임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이제는 이 게임의 기본 규칙에 꽤 익숙하고, 따라서 이 게임을 게임으로서, 즉 번역을 번역으로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을 요구하는 것에는 번안의 시기로 퇴행하는 요소가 있는 것인데, 사실 모든 퇴행적 충동이 그렇듯이 그 힘은 여전히 꽤 강하다.
이런 무의식적 번안 충동에는 이질적 요소의 거부라는 미성숙한 동시에 위험한 면도 숨어 있다. 타자가 다르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성숙하고, 그것을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번역은 이와 달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럼에도 같은 면을 찾아내려는 의지, 서로 다른 것에서 제3의 영역으로 가는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에서 출발하며,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작업이다. 번역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르면서 같음으로 인해 생기는 팽팽한 긴장이나 이질적 요소는 부담이 아니라, 구태여 번역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인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중앙일보 2015.6.13 - 삶의 향기]
그런데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내가 타협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문화가 풍성해지면서 번역의 추세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소수 의견이었을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매끄러운 번역이 끝까지 가면 원문의 모든 설정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놓는 번안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도 번역 같지 않은 번역에 대한 요구의 뿌리에는 번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하는 조중환의 『장한몽』(1913)이 일본의 오자키 고요의 『곤지키야샤(金色夜叉)』(1899)의 번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인데(이 일본 소설 또한 미국 소설의 번안이라고 한다), 만일 『장한몽』이 번안이 아니라 그 일본 작품의 번역이었다면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뒤집어 말하면 외국 소설도 상품이 되는 순간 최대의 판매를 위해서는 ‘현지화 전략’이라는 요구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베스트셀러가 될 법하지 않은 고전 소설이 꽤 많이 팔린 적이 있는데, 독자가 팽창하는 시점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 등장인물 이름을 원래 이름과 애칭 두 가지로(가령 윌리엄과 빌로) 혼용하여 헛갈리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럴 때 판매자가 고객을 가르치려 들기는 쉽지 않다. 독자가 늘어나는 순간, 또는 독자를 늘리려는 순간 현지 독자의 편의는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번안에서 상업적 고려가 전부인 것은 아니다. 『장한몽』이 그 시기 수많은 번안물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한 외래문화가 밀려오는 시기에는 이질적 요소를 최대한 제거해 내려는 번안적 충동이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 번안이 번역으로 바뀔 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아마 외국인인 존과 메리가 한국말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지만, 순진한 아이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번역된 소설은 애초에 허구인 소설을 더욱더 현실 같지 않은 설정 속에 집어넣는 복잡한 게임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이제는 이 게임의 기본 규칙에 꽤 익숙하고, 따라서 이 게임을 게임으로서, 즉 번역을 번역으로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을 요구하는 것에는 번안의 시기로 퇴행하는 요소가 있는 것인데, 사실 모든 퇴행적 충동이 그렇듯이 그 힘은 여전히 꽤 강하다.
이런 무의식적 번안 충동에는 이질적 요소의 거부라는 미성숙한 동시에 위험한 면도 숨어 있다. 타자가 다르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성숙하고, 그것을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번역은 이와 달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럼에도 같은 면을 찾아내려는 의지, 서로 다른 것에서 제3의 영역으로 가는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에서 출발하며,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작업이다. 번역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르면서 같음으로 인해 생기는 팽팽한 긴장이나 이질적 요소는 부담이 아니라, 구태여 번역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인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중앙일보 2015.6.13 - 삶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