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77회 - " 왜 우리는 초기 대응을 못할까? "

영광도서 0 564


이번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여론과 주요 언론들은 초기 대응을 발 빠르게 하지 못한 정부 기관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숭례문 방화 사건이나 세월호 사고와 같은 대형 사고를 겪고 나서도 정부의 초기 대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보이니 국민은 정부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세월호와 같은 큰 사고를 겪은 후 빠르고 정확한 초기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음에도 비슷한 실수는 반복됐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항상 늑장 대응을 해서 일을 크게 키우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것일까.

 최근 지인 한 명이 우리나라 대기업을 그만두고 다시 실리콘밸리로 돌아간다는 연락을 해왔다. 떠나기 전 같이 밥을 먹으며 그간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일하며 힘들었던 점을 털어놓았다. 외국인인 그는 문화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가 가장 어렵다고 한 점은 “윗사람이 문제가 있는 의견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아래 실무진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경직된 사내 분위기”라고 했다. 그래서 문제가 뻔히 보이는 일도 시키니까 로봇처럼 해야 하거나 아니면 윗사람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설득하고 일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그 일련의 과정에 불필요한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고 했다.

 마치 어른이 말할 때 감히 아랫사람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식의 권위적인 조직 분위기가 일의 효율성은 물론 직원 간의 소통을 저해하고 있음에도 개선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는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윗선에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다른 기업에서 그와 비슷한 사업을 시작하면 그때서야 급하게 따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즉 리더가 적극적인 리드를 하지 못하고 항상 일이 벌어지면 주로 따라서 반응만 한다는 것이었다.

 맬컴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보면 이와 유사한 국내 조직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1997년 괌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비행기 사고 원인을 조사하면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나쁜 기상 조건이나 괌 비행장의 유도등 고장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사고 원인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바로 동승하고 있던 부기장과 기관사가 기장의 무리한 착륙 시도에도 전혀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부기장은 상관인 기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걸린 중요한 일임에도 직설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하다 보니 그런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을 떠나는 나의 지인이나 글래드웰의 설명은 우리나라 조직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면서 처음 내 질문에 대한 답의 힌트도 주는 것 같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 시대와 군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정부를 비롯한 많은 조직이 상명하복식 권위적인 모습으로 굳어버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피라미드식 조직에서는 실무진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위에서 결정을 내리면 실무진은 그 일을 받아 수행하는 데 급급하다. 그런 조직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일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수동적이 되면서 윗사람 의중만을 살피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상관의 입장에선 본인에게 충성하는 직원이 좋게 보일 수는 있지만, 회사를 바라보는 고객이나 정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입장에선 고객이나 국민이 아닌 조직 내 상관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걱정하는 그들을 믿지 못하게 된다.

 결국 경직되고 권위적인 구조 속에선 조직의 리더가 상황의 엄중함을 빠르게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두지휘하기 전까지는 신속하고 정확한 초기 대응을 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스란히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구조에서 현장 실무진이 적극적으로 나서긴 어렵기 때문이다. 해경이 세월호에 일찍 도착했으면서도 골든타임 동안 구조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나 숭례문 방화 때도 지붕을 뜯어 진화하지 않고 5시간에 걸친 소극적인 대처로 결국 누각이 붕괴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메르스 역시 여론의 몰매를 맞고 난 후 비로소 적극적인 대응이 이뤄지고 있다.

 권위적인 조직 문화를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선 결국 리더의 빠른 판단과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그러면 분명 위기 상황에서는 일사불란하게 한마음으로 뭉치는 우리나라 사람의 강점이 빛을 발할 것이다. 제발 리더는 뒤에서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닌 리더답게 앞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부탁드린다.


[중앙일보 2015.6.12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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