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86회 - " 바람이 분다 … 책을 펼쳐야겠다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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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어머니는 까막눈이었다. 열셋 어린 나이에 열다섯 살 더 먹은 남자와 살림을 차려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과 헤어진 뒤 식모살이를 해가며 홀로 키운 두 아들은 걸핏하면 싸움질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둘째가 꼴찌 성적표를 받아오자 애가 탄 어머니는 궁리 끝에 결단을 내린다. 아들들을 도서관에 데려가 무조건 일주일에 책을 두 권씩 읽고 독후감을 쓰란 숙제를 내준 거다.
글씨보다 그림이 많은 책을 고르다 보니 자연도감을 줄줄이 읽어 치운 둘째. 어느 날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돌 이름을 맞혀보라고 하자 혼자 손을 번쩍 들었다. “흑요석(黑曜石)요!” 그게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친구들의 달라진 눈길에 신이 나서 공부에 매진하더니 1년 반 만에 1등 자리에 올랐다. 이후 ‘신의 손’이라 불리는 명의가 돼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의 위업을 달성한 그는 벤 카슨. 요즘 미국 대선판에서 ‘막말 지존’ 도널드 트럼프를 위협하는 공화당의 유일한 흑인 후보, 바로 그 사람 얘기다.
카슨을 놀라운 입지전의 주인공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걸, 그래서 독후감을 제대로 썼는지 알 길이 없다는 걸 아들들은 몰랐다. 다만 성심을 거스르지 못해 억지로 책을 손에 들었고 책 속에서 길을 찾았다.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책 속에선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책의 힘을 빌려 그는 현실에서도 모두가 꿈꾸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온종일 선선한 바람이 불어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란 상투적인 말 대신 책 덕분에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 얘기를 슬쩍 건네봤다. 독서의 유익함을 누누이 늘어놔 봤자 TV로, 스마트폰으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책보다 수십·수백 배 자극적인 재미가 넘쳐나는 세상, 카슨의 인생 역전 성공담이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다만 몇 명이라도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면 그것 역시 작은 기적이 아닐까.
내친김에 책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진 사례 하나 더 소개해 보련다. 유려한 문장의 기사로 손꼽히는 후배 기자 K씨. 중·고교 시절 등수가 뒤에서 세는 게 빨랐던 그는 어찌어찌 이름 없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학업에 뜻이 없어 곧장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병영 휴게실에 비치된 책을 들춰봤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더라나. 인근 읍내 서점까지 드나들며 군 복무 중 라면 상자 두 개 분량의 책을 독파했단다. 뒤늦게 공부의 즐거움을 깨친 그는 제대 후 대입 시험에 재도전해 서울의 유수한 사립대에 합격했고 ‘언론고시’까지 가뿐히 통과해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거다. “아직도 어릴 적 친구들은 신문사에 다닌다고 하면 잔심부름하는 사환인 줄 안다.” 그가 수줍게 털어놓은 반전 체험담이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 평소 마음에 담고 되새기는 영어 경구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읽는 책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read)’란 말 역시 참이라고 믿는다. 벤 카슨이나 후배 K씨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 역시 “나를 키운 건 8할이 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던 D 출판사의 100권짜리 세계 명작 전집, 중학교 무렵 밤을 새워가며 보고 또 봤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데미안』 『죄와 벌』…. 성장기에 만났던 주옥 같은 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돼 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할 따름이다.
여러 해 전 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나온 기사 중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이 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토지』를 다 읽은 사람, 읽다 만 사람, 읽지 않은 사람….’ 아마 다른 귀한 책들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삼국지』를 다 읽은 사람, 읽다 만 사람,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그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부분을 놓치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책을 펼쳐야겠다.
[중앙일보 2015.10.6 삶의 향기-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글씨보다 그림이 많은 책을 고르다 보니 자연도감을 줄줄이 읽어 치운 둘째. 어느 날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돌 이름을 맞혀보라고 하자 혼자 손을 번쩍 들었다. “흑요석(黑曜石)요!” 그게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친구들의 달라진 눈길에 신이 나서 공부에 매진하더니 1년 반 만에 1등 자리에 올랐다. 이후 ‘신의 손’이라 불리는 명의가 돼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의 위업을 달성한 그는 벤 카슨. 요즘 미국 대선판에서 ‘막말 지존’ 도널드 트럼프를 위협하는 공화당의 유일한 흑인 후보, 바로 그 사람 얘기다.
카슨을 놀라운 입지전의 주인공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걸, 그래서 독후감을 제대로 썼는지 알 길이 없다는 걸 아들들은 몰랐다. 다만 성심을 거스르지 못해 억지로 책을 손에 들었고 책 속에서 길을 찾았다.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책 속에선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책의 힘을 빌려 그는 현실에서도 모두가 꿈꾸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온종일 선선한 바람이 불어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란 상투적인 말 대신 책 덕분에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 얘기를 슬쩍 건네봤다. 독서의 유익함을 누누이 늘어놔 봤자 TV로, 스마트폰으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책보다 수십·수백 배 자극적인 재미가 넘쳐나는 세상, 카슨의 인생 역전 성공담이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다만 몇 명이라도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면 그것 역시 작은 기적이 아닐까.
내친김에 책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진 사례 하나 더 소개해 보련다. 유려한 문장의 기사로 손꼽히는 후배 기자 K씨. 중·고교 시절 등수가 뒤에서 세는 게 빨랐던 그는 어찌어찌 이름 없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학업에 뜻이 없어 곧장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병영 휴게실에 비치된 책을 들춰봤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더라나. 인근 읍내 서점까지 드나들며 군 복무 중 라면 상자 두 개 분량의 책을 독파했단다. 뒤늦게 공부의 즐거움을 깨친 그는 제대 후 대입 시험에 재도전해 서울의 유수한 사립대에 합격했고 ‘언론고시’까지 가뿐히 통과해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거다. “아직도 어릴 적 친구들은 신문사에 다닌다고 하면 잔심부름하는 사환인 줄 안다.” 그가 수줍게 털어놓은 반전 체험담이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 평소 마음에 담고 되새기는 영어 경구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읽는 책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read)’란 말 역시 참이라고 믿는다. 벤 카슨이나 후배 K씨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 역시 “나를 키운 건 8할이 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던 D 출판사의 100권짜리 세계 명작 전집, 중학교 무렵 밤을 새워가며 보고 또 봤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데미안』 『죄와 벌』…. 성장기에 만났던 주옥 같은 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돼 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할 따름이다.
여러 해 전 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나온 기사 중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이 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토지』를 다 읽은 사람, 읽다 만 사람, 읽지 않은 사람….’ 아마 다른 귀한 책들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삼국지』를 다 읽은 사람, 읽다 만 사람,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그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부분을 놓치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책을 펼쳐야겠다.
[중앙일보 2015.10.6 삶의 향기-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