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87회 - " 깨어 있는 현재가 마음의 고향입니다 "

영광도서 0 513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이틀 동안 내리더니 드디어 하늘이 파란 민얼굴을 내민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랗고 빨간 손을 한 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무대 삼아 바람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춘다. 나에게 매년 초가을은 마음 본성으로 돌아가는 수행의 시간이다. 올해는 예전부터 꼭 한 번은 가겠노라고 내 스스로와 약속했던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 위치한 틱낫한 스님의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 와 있다. 2013년 틱낫한 스님께서 여러 제자와 함께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법문을 통역했던 일로 귀한 인연을 맺었다. 틱낫한 스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어떻게 수행 공동체를 통해 실천되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드디어 시절 인연이 된 것 같다.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 운동과 참여 불교 운동을 이끄셨다. 스님께서 노력하시는 모습을 본 마틴 루서 킹 목사께서 크게 감동해 노벨 평화상에 추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프랑스 남부에 작은 수행 공동체를 열고 스님의 가르침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평생 수행을 하셨다. 처음엔 작았던 공동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승려의 숫자도 늘고 방문 수행자도 많아지면서 지금 규모의 플럼 빌리지가 된 것이다. 스님의 연세가 아흔이 되시면서 작년부턴 법문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많이 불편해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럼 빌리지는 여전히 전 세계 65개국에서 수행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렇다면 어떤 특별한 수행을 하기에 전 세계 사람들은 먼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오는 것일까? 처음 플럼 빌리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이 이곳 수행자들은 모두 천천히 걷는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어딘가를 가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현대인의 일상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마치 걷는 것 자체를 즐겨도 된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천천히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걷는 것만 천천히 걷는 줄 알았는데 밥도 역시 아주 천천히 먹는다. 음식을 한입씩 물고 고요 속에서 그 과정을 충분히 음미한다. 아무리 산해진미라 해도 그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면 그 맛을 모르고 먹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차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마음이 온전히 깨어 그 맛을 느끼게 되면 아주 새롭게 다가온다. 

 틱낫한 스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걷는 것과 먹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온전히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지금 무언가를 하면서도 마음이 자기 생각 속에 빠져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 와서 깨어 있는 것이다. 왜냐면 여기 현재가 바로 수행자들이 찾던 마음의 고향이자 귀의처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현재로 온 마음은 아무런 상념이 없고 편안하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지 않으니 앞 사람 얼굴이 보이고 온전히 지금을 즐기게 되니 마음이 바쁘지 않고 평화롭다. 

사진 크게보기[일러스트=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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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기 생각에 빠져 현재를 놓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깨어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현재 쉬는 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숨은 우리 몸과 마음을 연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다리다. 숨이 편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반대로 마음이 급하거나 불안하면 숨도 역시 급하고 불안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숨은 항상 지금 현재에 쉬고 있다는 점이다. 숨을 놓치지 않고 있으면 결국 현재를 놓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숨을 느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숨이 편안하고 깊어지면서 마음도 역시 따라서 편안하고 깊은 침묵 속의 평화를 맛보게 된다. 

 마음이 이렇게 숨을 통해 깊은 침묵의 상태에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지혜 또한 열리게 된다. 평소에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나’라고 동일시했는데 생각과 생각 사이에 있는 평화로운 침묵의 공간을 경험하게 되면서, 생각은 자기가 알아서 일어났다가 자기가 알아서 사라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나와 상관없이 일어났다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는 것이 생각이라 올라오는 생각들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된다. 더불어 평화로운 침묵이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면 어디에서 침묵이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 도대체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안팎의 분별, 나와 세상으로 나누던 차별이 살아 있는 침묵 속에서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노을로 물들면서 어느 스님의 저녁 종성 소리가 경내를 평화롭게 울린다. 저녁 수행을 하러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수행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살아 있다. 온 우주가 감사함으로 한 송이 꽃을 피운다.

[중앙일보 2015.10.7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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