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2회 - " 걷기는 몸 운동, 마음 운동이다 "

영광도서 0 393
내 주변에 사는 작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걷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북한산에 자주 오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주로 걷는다. 일부러 버스정거장 서너 개를 남겨 두고 내려서 집으로 가는가 하면 약속 장소까지 한 시간 넘게 걷기도 한다. 걷기는 건강을 위한 좋은 습관일 뿐 아니라 창작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나도 자극을 받아 자주 걷는다. 걷다 보니 매일 다니는 큰길이 지루해 처음 가보는 골목길을 찾게 된다. 우리 동네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해 구불구불 돌다 보면 사람 사는 냄새와 그늘에 가려진 자잘한 삶의 모습이 흥미를 돋운다. 평소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새로운 면을 보고 놀라는 것 같은 즐거움을 골목길이 주기도 한다. 집 근처에 옛날 이발소가 두 개나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골목길이었다. 자동차와 대로와 바쁜 일상이 이 즐거움을 앗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원과 시인으로 사느라 정신없을 때 나에게 계속 시를 쓰게 해준 것도 걷기였다. 시 쓰기가 즐거워도 직장 생활과 병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는 시 쓰는 일이 한가한 일이었는데 등단하고 나니 확 달랐다. 취미로 끼적거리는 것 갖고는 어림없었다. 시는, 분량은 적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꽤 필요하다. 힘들인 만큼 완성도가 달라진다. 적당히 시처럼 보이게 쓰기는 쉬워도 잘 쓰기는 어렵다. 회사 일을 줄이거나 조금 하고 많이 한 것처럼 눈가림할 수는 없었다.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먹고사는 일이 먼저고 시 쓰기는 그 다음이다. 자연히 시 쓸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스스로 좋아서 시작한 일이 짐이 되고 일이 되고 책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이나 외출 시간에 걷다가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종종 생겼다. 시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얼른 받아써야 했다. 부랴부랴 주머니를 뒤져 영수증 쪽지라도 찾아내 메모를 했다. 바로 포획하지 않으면 그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옷을 갈아입다가 주머니 여기저기서 쪽지들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시는 전혀 시 같지 않은 사소한 곳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좋은 시는 위장해도 찰나에 월척의 느낌이 온다.

                     걷기에는 생각에 활력을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


 회사에서는 시간이 생긴다 해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밤늦게 혼자 사무실에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눈이 늘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고, 조금이라도 뒷골이 당기면 시적 상상력은 바로 움츠러들었다. 책상 앞에서 펜과 백지를 준비하고 분위기 잡고 쓰려고 할 때도 시가 써지지 않았다. 쓰려고 의식하면 시는 오지 않는다. 시는 상식이 아니라 몸속 깊이 숨겨진 내면을 꺼내는 일이고,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길에서는 많은 사람이 옆에 있어도, 주변이 시끄러워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시를 쓸 때 필요한 것은 조용한 분위기와 독립된 장소가 아니라 의식의 자유로움과 익명성의 편리함이었다. 시끄럽고 혼잡한 전철이나 버스나 대로변에서도 홀로 산사에 있는 듯 집중하여 시를 쓸 수 있었다. 소음과 혼잡과 어수선함은 시를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시 쓰는 나를 자극했다. 길은 활기차다. 그 활기가 내 감각과 정서를 자극하고 내 시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실내는 막힌 공간이지만 길은 무한히 열린 공간이다.

 시적 영감은 대체로 휴식의 순간에 온다. 길에 나서면 애써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과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생각 없이 눈에 닿는 대로 시선을 던지게 된다. 방심 상태가 된다. 휴식과 방심은 내면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직관적, 창조적인 사유가 잘 흘러나오도록 유도한다. 걸으면서 사색하기를 즐겨 했던 장 자크 루소도 “걷기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고 하였다.

 머리는 종종 나를 속여도 발과 심장은 정직하다. 걷자. 발과 심장으로 내 안의 잠재력을 마사지하자. 내 몸의 창조적 리듬을 뛰게 하자.



중앙일보[2012.07.26. 삶의 향기 -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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