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45회 - " 서점을 잃어가는 시대의 그늘 "

영광도서 0 399
책은 새로운 우주를 만들고, 서점은 허기를 채워주는 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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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잃은 우리의 영혼은 새장 속의 새처럼 고지식한 통념에 갇히게 될것



한천(寒天)이 시간의 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연이은 한파에 빙벽 앞에 선 느낌이다. 청나라 문장가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는 경서(經書)를 읽는 것이 좋다고 했다. 정신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여름에는 역사서, 가을에는 제자백가, 봄에는 문집 읽는 것이 제격이라고도 했다. 계절의 흘러감에 계합하는 독서의 대상을 추천한 것이긴 하지만 장조는 아마도 사시사철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 이태준은 한 산문에서 책이야말로 감정과 정신과 사상의 의복이며 주택이라고 했다.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라며 책 예찬론을 펼쳤다. 이태준은 서점에만 들르면 급진파가 된다고 썼다. 책을 일단 소유하고 본다는 것이다.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여는 그 맛은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수록 복된 일이라고도 고백했다. 서점에서 책을 만나는 순간의 벅찬 마음을 그리 비유했던 것일 테다.

요사이 서점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잦게 들려온다. 꽤 이름이 있던 한 인터넷 서점은 매각되었고, 서울대 인근 서점 광장서적은 최근 부도 처리되었다. 서울대 인근 이 서점은 모 정치인이 사회과학 서점으로 문을 열었던, 오랜 전통의 서점이었다.


우리나라 국민의 월평균 독서량이 0.8권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니 출판시장의 침체, 서점과 도매상의 폐업 속출이 다 연유가 있는 셈이다. 한국대학신문의 자료를 보더라도 대학생의 월평균 독서량은 2.2권,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 학생이 18.4%, 여가 활용은 웹서핑이 대세라고도 한다.

또한 한 연구소 자료를 보니 전국에서 4개 군(郡)에는 아예 서점이 없다. 순일하게 책만 파는 서점도 15년 만에 68%가 줄었다. 책과 서점을 잃어가는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나의 사적인 경험으로도 서점을 꽤 여럿 잃었다. 고려대 인근 ‘장백서점’과 연세대 인근 ‘오늘의 책’, 또 대학 시절 자주 찾아갔던 ‘종로서적’도 잃었다. 비교적 건재하다던 서점들이 이처럼 무너졌으니 내 살던 하숙집과 자취방 골목의 동네 서점들을 잃음은 이루 다 그 낱낱의 수를 손꼽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서점은 책을 파는 상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서점은 크고 소소한 약속과 첫 만남과 재회의 장소였다. 내 기억으로는 많은 영화에서도 그러했다. 영화 ‘노팅 힐’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던 남자는 책방 문을 열고 불현듯 들어오는 인기 영화배우를 맞닥뜨리는 사랑의 사건을 경험한다. 영화 ‘마린’에서 레스토랑 비평을 하는 남자는 서점에서 여자를 대면하고 첫눈에, 단숨에 사랑에 빠져든다. 영화 ‘비포 선셋’에서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이 사랑하던 이를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난 곳도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였다.

서점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낭만이 움트고 진행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서점은 많은 사람에게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충전소였다. 동네 서점에 들러 책을 주문하고 사나흘을 기다리던 일도 허다했다. 주문을 내고 책을 받기까지의 그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기는커녕 되레 아름다운 설렘의 시간이었다.

서점 경영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당국에서 서점 지원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선 동네 서점에서는 지역과 서점이 서로 돕는 방안을 찾기 위해 주민간담회를 열기도 한다. 동네 서점에서 작가 초청 강연, 낭독회, 독서토론회 등을 여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모양이다. 동네 서점 회생을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사람들의 안중에서 책이 사라지는 시대는 불행하다. 동네에서 서점이 사라지는 시대는 불행하다. 책을 잃으면 우리는 거울과 열쇠와 빛과 자율성과 조화를 잃게 된다. 서점마저 동네에서 싹 사라져 없어지는 일을 상상해보라. 책과 서점을 잃은 우리의 영혼은 속물근성으로 닮아가고, 급기야 새장 속의 새처럼 고지식한 통념에 갇히게 될 것이다. 우리 의식에서 개안(開眼)과 신비와 경이와 도약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서점을 잃은 동네들은 고만고만해질 것이다. 게다가 골목 상권이 죽어간다는 얘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요즘 아닌가.

릴케는 한 편의 시가 사물과 대상을 말하고 예찬함으로써 생동시켜준다고 했다. 파울 첼란은 한 편의 시가 “하나의 타자의 안건(案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디 시뿐이겠는가. 한 권의 책은 새로운 세계와 우주를 탄생시킨다. 책과 서점을 더 많이 잃게 된다면 우리는 이 경이로운 힘의 쇠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책과 서점을 잃으면 우리의 영혼에는 사막만이 남게 될 것이다. 로르카가 시 ‘어떤 영혼들은…’에서 쓴 대로 ‘푸른 별’과 ‘시간의 갈피에 끼워 놓은 아침들’과 ‘꿈’과 ‘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열정의 환영(幻影)들’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우리들 미래의 자화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동아일보[2013.1.12 동아광장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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