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57회 - " 자기주도 학습마저 학원에 기대면 자기주도 인생은 어디서?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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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7
부모 입장에선 갓 태어난 아기가 천재처럼 여겨진다. 몸을 뒤집는 것도, 옹알이 시작하는 것도 적어도 다른 집 아기보다는 빨라 보인다. 내 아이는 뭔가 다르다. 그래서 맨 처음 먹이는 우유가 천재에 걸맞은 ‘아인슈타인 우유’란다. 그러나 두세 살쯤 되면 아인슈타인급(級) 두뇌가 아니라는 자각이 든다. 실망하기엔 이르다. 한 단계 낮춰 ‘파스퇴르 우유’로 바꿔 먹인다. 아이가 더 성장하면 그것도 욕심이라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학부를 갈 수재임에는 틀림없으니 ‘서울 우유’로 바꾼다.
우유 바꿔 먹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고교에 입학해 첫 시험을 치르면 서울우유마저 턱도 없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이번에는 ‘연세 우유’로 갈아 본다. 고3 수험생이 되어 모의수능시험을 두어 번 치른 뒤 연세우유는 다시 ‘○○우유’나 ‘○○두유’로 달라진다. 그럼 수능본고사 성적이 나온 뒤 맨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우유는? ‘저지방 우유’란다. 저 멀리 지방에 있는 대학.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부모의 과잉 기대와 대학 서열화가 낳은 씁쓸한 유머다.
사설학원이 즐비한 거리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자기주도학습 전문학원’이라는 간판들 때문이다. 자기가 알아서 할 공부를 학원이 해준다고? 얼핏 생각해도 형용모순(oxymoron)이다. 개별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나 원리를 가르칠 필요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고기 몇 마리보다 그물 짜는 법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겉으로 하는 말이고, 속내는 특목고의 자기주도학습 전형이나 입학사정관제 대입일 것이다. 학습계획표를 짜주는 가정방문형 업체에 ‘자기주도학습 지도사’라는 자격증까지 생겼다니 사설학원은 정말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기민성을 갖췄다. 정작 학원 안 가고 스스로 공부해 특목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인의 아들은 또래들이 다 하는 ‘스펙 쌓기’에 밀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던데.
‘대학입시 간소화’는 박근혜 정부의 교육 공약이다. 공교육정상화촉진특별법도 만들 예정이라 한다. 취지엔 공감하나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별개 문제다. 솔직히 말해 불안하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이미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교교사인 친구는 “입시가 있는 한 자기주도든 뭐든 새 제도가 생기면 사설학원들이 바로 파고들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주도 학습은 이미 학원주도 학습 또는 부모주도 학습으로 변질됐다. 좋다. 20대까지는 학원이나 부모 덕을 본다 치자. 30대 이후엔 어쩔 것인가. ‘자기주도 인생’을 살아야 할 시기에도 학원이나 부모에게 기댈 것인가. 이런 말을 하자 친구는 “그런 말 하면 꼰대 소리만 듣는다”며 웃었다.
[중앙일보 2013.3.19 분수대 -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