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90회 - " 역사 교과서 논쟁, 두 개의 오류 "

영광도서 0 557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쟁은 소모적이다. 논쟁의 주제를 잘못 설정해 놓고 부질없는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바르게 쓰자는 주제와 국정이냐 검인정이냐는 논쟁은 별개 트랙이다. 국정은 나쁜 역사 교과서이고 검인정이면 좋은 교과서라는 잘못된 등식에서 논쟁의 오류가 생겨났다.

 원래 검인정교과서는 국정보다 진화된 형태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청소년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선진형이다. 국정은 대체로 독재 또는 후진국에서 쓰는 정권의 일방적 주입식 교과서 편찬 방식이다. 이게 일반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과서 현실에선 이런 일반론을 적용할 수 없다. 보수 정권이 역사를 왜곡 미화했듯, 진보 또한 민중 또는 진보 성향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 미화하길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 보수 정권 시절 국정교과서를 보자. 5·16 정변을 부정부패 정권을 무너뜨린 영웅적 거사이고 혁명으로 기술했다. 정권 연장의 수단에 불과했던 10월유신이 민족중흥이라는 말로 미화 포장되었다. 북의 김일성은 가짜다. 항일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일찍이 죽었고 젊은 김일성이 이를 도용했다고 당시의 국정 사회도덕 교과서는 썼다. 북엔 마치 뿔 달린 도깨비들이 사는 세상처럼 그려졌다. 이러니 북한에 다녀온 작가 황석영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탄식을 했을 정도다.


. 그 뒤를 이은 진보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를 검인정으로 바꾸고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근현대사 교과서를 별도 제작해 역사논쟁을 불러왔다. 단정(單政)을 이끈 이승만은 분단의 책임자니 건국 대통령이 될 수 없고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닌 정부수립일이 될 뿐이다. 유상분배의 남쪽 토지개혁보다 무상분배의 북의 개혁을 높게 평가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 평가엔 인색하면서도 반민주 반인권의 독재 탄압에는 강한 방점을 둔다. 이러니 3대 세습의 북한 정권엔 비교적 너그럽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끈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선 친일 독재자로 폄하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에 비춰보면 ‘국정’은 악이고 ‘검인정’은 선이다 라는 일반론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는다. 국정교과서가 보수 정권 미화에 기여했듯, 검인정 또한 386세대들 간에 팽배했던 민중사관의 영향 아래 역사를 새롭게 왜곡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번 사안을 국정이냐 검인정이냐는 프레임으로 몰고 가지 않고 역사 교과서를 바르게 쓰자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했다면 사정이 이토록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교과서가 정치 문제로 비화하고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데는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크다. 폭압 정권에 굴복해서 역사를 미화했든, 항거를 위해 왜곡했든 그 책임은 역사가에게 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이 차제에 발 벗고 나서 이를 시정하자고 앞장설 줄 알았다. 이번만큼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고 두 손 들고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 학회 이름으로, 대학 이름으로 국정은 안 된다고 거부하며 국정교과서 집필을 한사코 반대한다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오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다(Every man is his own historian)’라고 미국의 역사학자 칼 베커는 말했다. 누구나 과거를 지니고 산다. 때론 일기도 쓰고 과거를 회상하며 반성의 자료로 삼는다. 과거의 잘잘못을 귀감 삼아 미래를 대처한다. 이 점에서 역사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공동체의 역사나 다중의 역사를 쓰는 경우 아마추어로선 어렵다. 여기서 스페셜리스트인 역사가가 등장한다. 엄정 중립과 균형을 요구한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달라야 한다.

 일기 쓰듯 역사 교과서를 쓸 수는 없다. 사실에 입각해 자료를 수집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수가 인정할 다중 공통의 역사, 한 나라의 역사를 써야 한다. 특히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적 평가가 어려운 ‘가까운 과거’는 유보하고 연대기적 기술을 해야 한다.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현재로 보느냐는 시대 구분에도 합의해야 한다.

 ‘풀과 가위’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사실에 없는 일을 풀칠로 덧씌우고 보기 싫은 과거는 가위로 잘라내는 역사의 반역행위를 역사학자 콜링우드는 그렇게 표현했다. 풀과 가위의 역사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 교과서를 언제까지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진정한 역사가라면 풀과 가위의 역사를 벗겨 내는 작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역사 전공자들이 모두 손 빼고 나 몰라라 할 때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그때 가서 나는 그곳에 없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참여를 통해 바른 역사를 바로 써야 한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의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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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이로 2015.10.22 시론 - 권영빈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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