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04회 - " 존대어 사회에는 막말이 없다 "

영광도서 0 604
등산길에서 앞서가는 고령자끼리 나누는 대화가 무척 살갑고 정겹게 들려왔다. 우정이 가득 깃든 푸근한 반말로 주고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말이 우리 사회의 막말 풍토와 궤를 같이한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지 않은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막말이 마치 일상의 언어인 양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말은 생리상 반말로 시작해 반말로 끝나기 마련이며, 드물지 않게 삿대질과 폭언·폭행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말이 지닌 또 다른 민낯이어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전 독일 학생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서로 고함지르며 언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독일에서 싸움하는 걸 처음 구경하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맥없이 끝나고 말았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험한 인상만 남긴 채 ‘흥행’은 끝나고 만 것이다. 둘은 반말하던 학우들이었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지자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존대어로 바꾸었다. 즉 독일어의 반말인 ‘너(Du)’가 존대어인 ‘당신(Sie)’으로 순간 바뀐 것이다. 그리고 서로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휘두르면서 상대방에게 “당신이 먼저 쳐!” “아니 당신이 먼저 쳐!” 하며 으르렁거리기만 반복하다가 싱겁게 끝나버렸다. 많은 여운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독일은 언성이 높아지면 갑자기 반말을 존대어로 바꾼다
우리 사회도 반말 대신 존대어를 조직 언어로 삼았으면


독일에서는 상대방 몸에 먼저 손을 휘두르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해자’가 되고 법정 불이익이 따른다. 언쟁하던 법대생들인 두 학생은 몸싸움에 연루된 기록이 남으면 판사·검사 시험 자격이 박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 사회질서를 이끄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보았다.

간혹 미국 야구 경기장에서 감독과 심판이 손과 팔은 뒷짐 지고 배를 맞대며 격하게 어필하는 것, 그리고 농구 감독이 늘 정장 차림인 것의 깊은 뜻을 되새기게 하는 부분이다.

아울러 필자의 스승이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면 느닷없이 호칭을 ‘격상’하며 존대어를 쓰던 것을 떠올렸다. 영어권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꾸짖을 때 학생 이름 대신 ‘미스터(Mr.) 아무개’라며 성을 붙이며 시작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꾸짖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격한 반응을 존대어를 쓰면서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리라. 여기서 그 나라의 사회 교육으로서 세심하고 철저한 막말 방지책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독일어에는 당신을 뜻하는 ‘Sie’가 있고 너라는 ‘Du’가 있지만 독일 군대에서는 20세기 초부터 군사 언어로 반말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존대어만 사용해야 하는데 아무리 가까운 동급 장교나 사병끼리도 제삼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반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동네 친구 사이인 장교와 사병이 반갑게 만났더라도 제삼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존대어를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군법에 걸려 엄하게 다룬다고 한다.

일반 사회 조직에서든, 군이라는 특수 조직에서든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지시사항을 반말로 해야 ‘먹힌다’는 우리네 의식과는 거리감이 아주 크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시각에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국어사전에 보면 존대어는 ‘듣는 사람이나 제삼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쓰는 말’, 반말은 ‘함부로 낮추어 하는 말’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렇듯 존대어에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반말에는 상대의 인격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면, 더욱이 존대어는 우리 사회의 조직 언어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반말 소통이 아무리 살갑다 하지만 조직 소통 언어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래 국회의사당과 법정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는 막말과 폭언 행태는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 우리 사회를 깊은 우울증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다. 참으로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런 현상에 종지부를 찍는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사회의 조직 언어로서 존대어를 토착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대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기에 막말이 설 자리가 없으며, 비록 소박하지만 큰 복지 개념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2016.3.8 삶의 향기 -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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