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09회 - " 매력 <魅力>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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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매력은 종잡을 수가 없다. 따듯한 사람도 냉철한 사람도 매력이 있을 수 있다. 우아해서 좋은 음악도 있고 애절함으로 마음에 파고드는 음악도 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가고 싶은 거리도 있고 복닥복닥 사는 모습이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장터도 있다. 후더분한, 뾰로통한, 고색창연한, 구성진, 유머러스한 등이 모두 매력이란 말 앞에 올 수 있으니 매력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인가?
매력은 압도해 오는 무엇이 아니다. 끌어당기는 무엇이다. 더 보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서 다가가게 하는 힘이다. 굳이 크거나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크기로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능가할 수 없고 완벽하기로야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따라가기 힘들지만 이들에게는 ‘매력 있다’는 말보다 다른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그에 비하면 담양의 명옥헌이나 쇼팽의 녹턴은 작고 소박한 정자요 음악이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끌어당긴다.
작고 소박해도 매력에는 대책이 없다(매(魅)자에는 귀신이란 뜻이 들어 있다). 애써 피하려고 해도 자꾸 눈길이 간다. 게다가 느닷없이 마음에 들어온다. 설명도 예고도 없이. 그냥 꽂힌다.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루 종일 그 선율이 흘러나오는 그런 것이다.
매력은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며 '나다운'삶에서 나온다
'나답다'는 건 '자연스럽다'는 뜻이며 매력은 자연스럽다
매력은 쉬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불암의 터프한 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음악도들은 저도 모르게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가를 흉내 낸다. 어린 시절 나는 슈베르트의 곡을 빼다 박은 곡을 쓰곤 했다. 그러나 스승들은 ‘나다운’ 것을 발견하라고 권하셨다. ‘나다움’이 없으면 그 음악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무엇이 나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채 형성되지 않았으니 내가 누군지 알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슈베르트를 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버렸어도 내가 좋아했던 음악가들의 자취는 두고두고 남았다. 그 남아서 버릴 수 없는 것이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체취 같은 것이다. 체취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만일 그 체취가 페로몬같이 다른 곤충을 끄는 힘을 가졌다면 그것이 매력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매력은 향수나 명품과는 다르다. 아무리 골라도 그것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냄새와 치장으로 나를 꾸미기 때문이다.
‘나답다’는 것은 ‘자연(自然)’스럽다는 말이다. 매력은 자연스럽다. 따듯한 사람은 저절로 따듯한 것이고 터프한 사람은 저절로 터프한 것이지 꾸며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꾸밈은 매력이 될 수 없다. 중국의 산시(山西)성에 여행했을 때의 얘기다. 한 도시에 갔더니 멋진 ‘옛 중국다운’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새로 지은 관광용 거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망하는 나에게 동행한 사람의 얘기가 재미있었다. “이 거리가 지금은 사이비 전통거리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진짜 역사거리라고 우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까? 오래 가꾼 ‘나다움’이 아니라 새로 꾸민 ‘나다움’도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것이 되는 것일까?
왜 매력을 찾는가? 끄는 힘이 곤충들에게는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멀리 있는 짝을 유혹해서 짝짓기를 해야 종의 번식이라는 절체절명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 물론 인간에게도 성적 매력은 중요하지만 ‘삶의 향기’에서 말하는 향기가 그런 페로몬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돈도 사람을 끈다. 그러나 매력을 추구하는 것은 부유해지자는 것과 다르다. 또 부유해진다고 매력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따금 마을 입구의 큰 돌이 타이르듯 “바르게 살자”는 것도 아니다. 모범적으로 살고 건전한 거리 문화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캠페인은 자칫하면 그냥 꽂히는 소소함이나 사람마다 다른 체취나 오랜 숙성이 필요한 ‘나다움’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데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력이 없어지는 빠른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보니 매력은 결국 ‘나다운’ 삶에서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과 발걸음이 나에게 모인다. 하나의 작가가 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작가이다.
[중앙일보 2016.6.14 삶의 향기 | 이 건 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매력은 압도해 오는 무엇이 아니다. 끌어당기는 무엇이다. 더 보고 싶고 더 잘 듣고 싶어서 다가가게 하는 힘이다. 굳이 크거나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크기로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능가할 수 없고 완벽하기로야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따라가기 힘들지만 이들에게는 ‘매력 있다’는 말보다 다른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그에 비하면 담양의 명옥헌이나 쇼팽의 녹턴은 작고 소박한 정자요 음악이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끌어당긴다.
작고 소박해도 매력에는 대책이 없다(매(魅)자에는 귀신이란 뜻이 들어 있다). 애써 피하려고 해도 자꾸 눈길이 간다. 게다가 느닷없이 마음에 들어온다. 설명도 예고도 없이. 그냥 꽂힌다.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루 종일 그 선율이 흘러나오는 그런 것이다.
매력은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며 '나다운'삶에서 나온다
'나답다'는 건 '자연스럽다'는 뜻이며 매력은 자연스럽다
매력은 쉬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불암의 터프한 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음악도들은 저도 모르게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가를 흉내 낸다. 어린 시절 나는 슈베르트의 곡을 빼다 박은 곡을 쓰곤 했다. 그러나 스승들은 ‘나다운’ 것을 발견하라고 권하셨다. ‘나다움’이 없으면 그 음악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무엇이 나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채 형성되지 않았으니 내가 누군지 알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슈베르트를 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버렸어도 내가 좋아했던 음악가들의 자취는 두고두고 남았다. 그 남아서 버릴 수 없는 것이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체취 같은 것이다. 체취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만일 그 체취가 페로몬같이 다른 곤충을 끄는 힘을 가졌다면 그것이 매력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매력은 향수나 명품과는 다르다. 아무리 골라도 그것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냄새와 치장으로 나를 꾸미기 때문이다.
‘나답다’는 것은 ‘자연(自然)’스럽다는 말이다. 매력은 자연스럽다. 따듯한 사람은 저절로 따듯한 것이고 터프한 사람은 저절로 터프한 것이지 꾸며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꾸밈은 매력이 될 수 없다. 중국의 산시(山西)성에 여행했을 때의 얘기다. 한 도시에 갔더니 멋진 ‘옛 중국다운’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새로 지은 관광용 거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망하는 나에게 동행한 사람의 얘기가 재미있었다. “이 거리가 지금은 사이비 전통거리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진짜 역사거리라고 우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까? 오래 가꾼 ‘나다움’이 아니라 새로 꾸민 ‘나다움’도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것이 되는 것일까?
왜 매력을 찾는가? 끄는 힘이 곤충들에게는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멀리 있는 짝을 유혹해서 짝짓기를 해야 종의 번식이라는 절체절명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 물론 인간에게도 성적 매력은 중요하지만 ‘삶의 향기’에서 말하는 향기가 그런 페로몬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돈도 사람을 끈다. 그러나 매력을 추구하는 것은 부유해지자는 것과 다르다. 또 부유해진다고 매력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따금 마을 입구의 큰 돌이 타이르듯 “바르게 살자”는 것도 아니다. 모범적으로 살고 건전한 거리 문화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캠페인은 자칫하면 그냥 꽂히는 소소함이나 사람마다 다른 체취나 오랜 숙성이 필요한 ‘나다움’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데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력이 없어지는 빠른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보니 매력은 결국 ‘나다운’ 삶에서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과 발걸음이 나에게 모인다. 하나의 작가가 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작가이다.
[중앙일보 2016.6.14 삶의 향기 | 이 건 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