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12회 - " 우리에겐 ‘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

영광도서 0 536
자기는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건 성격장애
스스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며 자학하는 신경증도 문제다


지인을 통해 특이한 독일 친구 한 명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 온 지 5년이 넘었다는데 우리나라 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한국 문화나 역사에도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알고 보니 원래 계획은 일본에 있는 대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선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차선책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온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 음식은 잘 먹는데 조금이라도 매워 보이는 우리 음식은 먹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석사 프로그램은 영어로 진행됐기에 한국말을 배울 필요가 없었으며 지금 다니고 있는 한국 회사에서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대화가 진행될수록 이 친구는 한국 생활에 대한 불만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서울의 공해가 너무 심하고, 일본에 비해 거리가 더러우며, 사내 문화가 극도로 경직돼 있어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서열문화가 심해 회의 시간에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도 번번이 상관으로부터 무시만 당할 뿐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문제점만 조목조목 끄집어내 지적하는 독일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어서 서양 사람이 우리나라 회사에서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러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애초에 한국에 올 계획이 아니었고 일본 문화나 일본 음식을 더 선호하니 말이다. 그랬더니 이 친구 말이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서 일해 볼 생각으로 도쿄의 한 회사에서 두 달간 인턴십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생활해 보니 오히려 한국보다 더 갑갑하더란다. 한국 사람들은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표정 등에서 드러나는데 일본 사람들은 속내를 통 알 수 없어 힘들었다고 말이다.

한국도 문제고 일본도 문제라면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독일도 역시 문제란다. 독일인은 아시아인처럼 상냥하지 않고 무뚝뚝하며 자기 고향에는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도 없단다. 서울처럼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고 빨리빨리 일 처리를 해내지 못해 답답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자 지금 이 친구는 전형적인 성격장애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나 책임이 없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점이 그랬다. 한국에서 살기로 스스로 선택했으면서도 그 선택에 따르는 결과의 책임은 지려 하지 않고 무조건 남 탓, 외부 조건 탓만 하는 것이다. 본인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는 바꿀 것이 없고 다른 사람, 외부 조건이 변해 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이 내 마음처럼 되진 않는다. 그러니 불만과 원망만 늘어나고 불행한 심리 상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바로 자기 책임이 아닌 경우인데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로 돌려서 자학하는 경우다. 이런 증상을 보통 신경증이라 하는데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예를 들어 외국 바이어와 같이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시켰는데 음식이 좀 늦게 나오면 안절부절못하고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대해 바이어에게 반복해 사과를 한다. 사실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은 식당의 잘못이지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기 때문에 남들이 불행해진다고 여기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책임을 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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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교수로 임용돼 처음 미국 대학 강단에 섰을 때 학생들의 강의 반응에 상당히 민감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좋지 않거나 수업 태도가 불량하면 그것이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강의를 좀 더 잘하려는 노력은 하게 됐지만, 어느 순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와 주지 않는 학생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리 읽어 와야 할 교재를 읽어 오지 않고, 몇 번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과제를 하지 않으면서 무단결석을 일삼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경우까지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우리에겐 ‘적당한’ 책임이 있다. 앞서 말한 독일 친구처럼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들에게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이고, 반대로 본인 책임이 아닌 것까지 다 뒤집어쓰면서 자학하는 것도 문제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가 자신의 책임을 내게 다 떠넘기려 할 때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그건 당신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는 균형점을 잘 찾아 지혜로운 삶을 사시길 기원한다.

[2016.7.15. 중앙일보 - 마음산책 |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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