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새해 달력의 첫 장을 열며
며칠째 새해 덕담을 실은 문자 연하장이 밀려오고 있다. 뭔가 더 참신한 답신을 보내고 싶어 잠시 머뭇거리지만 나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로 답한다. 새해를 맞는 마음은 모두 같다. 어제와 다름없이 흐르는 시간에 무형의 경계를 짓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 다짐한다.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시간들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어느 한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도, 실은 우리 마음에 달린 일임을 안다. 우리 마음속에서 시간은 동일한 속도로 흐르지도 않으며 반드시 과거에서 미래로만 흐르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시간의 선형적 질서를 해체한 타임슬립 혹은 타임워프 소재의 서사가 가장 대중적인 콘텐트인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런 드라마들을 현실 도피적이라며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선형적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현재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고 현재를 전보다 나은 것으로 구성해낸다는 판타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흥미롭다.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은 지나간 과거를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시간 개념을 비판했다.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가상, 그리고 역사가 진보한다는 가상들을 파괴함으로서 인간이 직면한 현대의 위기 상황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선형적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역사주의가 파시즘적 논리에 동원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 그와 같은 전복적 시간관을 이끌어낸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그런 전복적 시간관과 역사관은 여전히 충분히 유효한 것 같다. 과거의 일은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둔 채 앞으로만 나아가자 한다면 현재의 평범한 일상도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바람 부는 광장으로 나서야 했던 그 겨울에 우리 함께 체험하지 않았던가.
지난 일은 모두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거나, 보다 풍요로운 내일을 위해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과거의 상처 따위는 과감히 묻어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지난 시대의 잘못을 밝혀내고 바로잡는 일에 대해서도 마치 드라마의 클리셰 장면을 보듯 이제 식상하다며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 한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시간의 힘인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은 더 깊이 묻히고 잊혀져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전복적 사유가 그래서 더 필요해지고 있다. 벤야민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 ‘섬광과도 같은 혁명적 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과거가 현재로 불러내어져 현재와 융합되는 그 순간의 강렬한 에너지가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현재와 접속하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흘러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다름 아닌 ‘오늘의 일’이다. 매년 습관처럼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로만 충만했던 새해를 이제 좀 다르게 맞이해 봐야겠다. 미래에 구애하듯 과거와도 소통하는 것, 그게 이 시간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법이다.
달력 앞에 선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지만 새해 맞이는 달력을 바꿔 거는 일로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나이만큼의 지나간 달력 개수가 있다. 달력은 또 하나의 일기장, 역사인 셈이다. 2 0 1 8년이 새 달력으로 시작됐다.
[출처: 중앙일보 2018.1.2 삶의 향기 - 고선희 |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