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내 속에 있는 두 개의 나
속엔 스스로 원하는 ‘나의 나’, 가족·사회 기대하는 ‘남의 나’ 있어
‘남의 나’ 보다 내 스스로 조절하며 즐겁게 사는 것, 그 속에 행복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곡으로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여러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람 심리를 정말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 속에 있는 여러 개의 ‘나들’을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부분이 참 좋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속에 있는 너무 많은 나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다른 사람을 상처 주고 내 마음도 편할 날이 많지 않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내 속에 있는 여러 개의 나들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질 수 있는 듯하다. 하나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자기 스스로가 원하는 ‘나의 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가족이나 사회가 기대하는 ‘남의 나’가 들어와 있다. 즉 ‘나의 나’는 내 안에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나 자기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향과 행동 등을 의미한다면, ‘남의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가 나에게 거는 기대나 바람·요구·책임이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되어서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의 ‘나’가 자리 잡고 있는데, 문제는 이 둘의 적절한 조화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성년이라도 성격이 강하거나 가부장적인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일수록 ‘나의 나’보다 ‘남의 나’의 힘이 너무나 강하다. 당연히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려서 배워야 하므로 부모님의 가르침과 통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도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나의 나’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심하면 ‘나의 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어,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 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 스스로가 아닌 남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상대에게 내 행복을 맡기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마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되어 버린다. 자기 스스로를 위한 삶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된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싸움을 반복하게 된다.
물론 ‘남의 나’로 사는 경우 장점도 있다. 바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칭찬도 많이 할 것이다.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착하게 사는 모습,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싫어할 부모나 배우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 분가하거나 부모나 배우자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거나 했을 경우엔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라도 ‘나의 나’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지만, 평생 남만 보고 산 사람은 그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결국에는 ‘나의 나’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께서 노년이 되셨을 때 이렇게 글을 쓰셨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나의 경우도 사십 대 중반이 되니 예전에 비해 남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알아보거나 말거나 대중목욕탕을 너무나도 편하게 다니고 있고, 강의나 글 청탁 요청이 와도 너무 무리일 것 같으면 거절을 꽤 잘하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또 ‘남의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면 비사회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어렸을 때처럼 ‘남의 나’에 눌려서 눈치만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적당히 내 스스로가 조절해가면서 즐겁게 사는 것, 그 속에 행복이 있는 것 같다.
[중앙일보 2018.2.7 마은산책 | 혜민스님 - 마음치유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