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도움의 기억은 살아있다

영광도서 0 906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갚으려는 마음이 올라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도움을 준 사람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도와준 경우라 해도 그 고마움이 마음에 남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여유가 된다면 선물이나 음식·금전으로 답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나 사람을 소개해 주어 마음의 빚을 갚기도 한다.

 

남을 돕는 공덕의 씨앗을 뿌리면

그 열매가 바로 돌아오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후 돌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후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보답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당장 보답할 것이 없어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도움에 대해 답례를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그 시간 차가 너무 커서 도움을 준 사람에게 직접 갚지 못하고 그 후손들에게 은혜를 갚는 경우도 생긴다. 그 예가 바로 페루 출신의 내 지인 미겔의 가족사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 중 도움과 관련된 가장 놀라운 이야기인지라 지면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마음이 들었다.

 

미겔의 할머니는 본래 중국 남부 광둥 성에서 살았다고 했다. 20세기 초·중반 격동기 시절,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 자식들에게 좀 더 좋은 미래를 주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는 가족들을 이끌고 남미 이민을 결정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남미로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출국과 이민에 필요한 서류가 복잡해 많은 돈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의지는 결연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가족 모두를 위한 이민 허가증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런데 미겔 할머니에게는 나이가 어린 아이였을 때 죽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죽은 아들 이름 앞으로도 이민 허가증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경우 그 허가증을 몰래 돈을 받고 파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겔의 할머니는 돈을 받지 않고 이웃집에 사는 아들뻘 되는 아이에게 그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혼란한 중국을 떠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그 아이는 서류상으로는 미겔 할머니의 아들이 되어서 남미 페루 땅을 밟게 된 것이다. 페루에 도착해서도 그 아이는 미겔 할머니 가족과 가까이 지내면서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작은 반전이 있다. 바로 미겔 할머니의 서류상 아들인 그가 페루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더 많은 경제적 기회가 있는 미국으로 다시 한번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그는 70년대 미국 뉴욕에 정착해 페루에서 배웠던 장사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꽤 크게 성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페루에 남아 있는 미겔 할머니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기 때문에 오실 수 없었지만, 페루에서 함께 성장한 친형제 같은 미겔 할머니의 아들·딸들은 가족 이민 초청을 통해 미국으로 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받았던 미겔 할머니로부터의 도움에 대한 보답을 반세기가 지나 할머니 후손들에게 하게 된 셈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페루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겔도 미국 대학에서 졸업을 하고 좋은 직장도 구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다 뉴욕에 사는 “삼촌” 덕분이라고 했다. 아마 미겔 할머니는 그 옛날 중국 광둥에서 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아이처럼 거두며 베푼 도움이 자신의 손자에게까지 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주역의 문언전에는 적덕여경(積德餘慶)이라 하여 ‘덕을 쌓으면 넘치는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일을 했던 그 당사자만 그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경사 나는 일이 차고 넘쳐서 그 후손들에게도 전해진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공덕을 잘 쌓으면 그 공덕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결국에는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고 가르친다.

 

예전에 나와 어르신 급식 봉사활동을 같이했던 분들에게 어째서 이렇게 빠지지도 않고 봉사 활동을 하실 수 있는지 여쭌 적이 있다. 한 분이 말씀하시길, 타인을 돕고 나면 몸은 좀 힘들지만 자신 마음 안에 날카롭게 서 있던 독기가 빠져나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하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공덕의 씨앗을 뿌리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이로운 열매가 돌아온다. 정화된 편안한 마음으로 바로 돌아오든, 아니면 반세기가 지난 후에 돌아오든 말이다.

 

[중앙일보 2020.9.16 | 마음산책 - 혜민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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