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책 처럼 좋은 인생 지도가 있는가

영광도서 0 965

실례인 줄 알지만, 제 졸시 한 편으로 당신에게 아침편지를 시작합니다.

‘달팽이와 함께 느릿느릿 사는 사람의 마을에 / 개별꽃 곁에 키 작은 서점을 내고 싶다 / 낡은 시집 몇 권이 전부인 백양나무 책장에서 / 당나귀가 어쩌다 시 한 편 읽고 가든 말든 / 염소가 시 한 편 찢어서 먹고 가든 말든’

‘치타슬로’라는 4줄짜리 짧은 시입니다. ‘치타슬로(Cittaslow)’는 ‘느리게 사는 도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입니다. ‘슬로푸드 운동’을 도우다 얻어 배운 말입니다. 저는 제 시와 같은 서점을 내고 싶었습니다.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싶어 은현리에 부지까지 구해놓고 여전히 도시에 발이 묶여 살고 있습니다. 꿈이란 것은 꿀 때도 즐겁지 만, 이룰 때 더 행복한 일입니다.

당신. 지난 11일이 ‘제5회 서점의 날’인 것을 아셨을 겁니다. 서점이라 해서 대형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동네서점 마을서점을 위한 날입니다. 11월 11일. 1111을 줄 세워 놓으면 책의 한자어인 冊을 닮았고, 책장에 꽂힌 책의 모습도 닮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빼빼로 데이’라 정해 놓고 가게마다 난리였지만, 사실 그날 제가 찾은 동네서점은 한산했습니다. 정부에서는 동네서점을 살리고 싶어 5년 전 서점의 날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더 힘든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당신. 당신의 첫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교과서를 빼고 오롯이 자신의 책 말입니다. 저는 고교시절, 지금 제가 봉직하는 대학에서 열린 고교생백일장에서 입상해 첫 책이 생겼습니다. 상(賞)이란 도장과 당시 단과대학 시절 학장의 이름이 같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책이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양장본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집과의 만남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더욱 단단히 가졌습니다.

제가 서점 출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이었습니다. 고교시절 만난 시는 교과서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당시 제 시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서점에서 계간문예지인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을 읽으며 문학의 신천지를 만났습니다. 두 계간지에서 발간하는 시선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서정주의 호 ‘미당’과 ‘청록파’ 시인을 묻는 국어시험을 쳤던 우리 세대에게 서점은 ‘시로 가는 비상구’였습니다.

대학 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문학잡지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저는 시안(詩眼)이 밝아졌습니다. 서점과 도서관은 저의 습작시대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약력이 나옵니다. 저는 제 약력을 어떻게 만들까 상상하며 첫 시집을 꿈꿨습니다. 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기에 서점은 제 꿈의 공장이기도 했습니다.

당신. 그로부터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급변했습니다. 서점은 대형화되고 인터넷서점까지 등장했습니다. 동네서점의 위기는 오래된 ‘문화병’(病)이었습니다. 현대화가 만든 부작용이었습니다. 동네서점을 살리기 위해 많은 투자가 있었고, 지금의 현실은 문화공간과 카페, 북스테이를 겸한 새로운 형태의 동네 서점이 자리 잡아 있습니다. 그 일에 헌신하고 연합하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동네서점 같은 작은 서점은 우리 시대를 지키는 작지만 소중한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상업주의에 길을 잃은 시대에 서점은 길을 안내해주는 나침반이며 별자리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오아시스입니다. 이 오아시스를 지키기 위해서는 구매자인 우리의 몫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원하는 책을 조금 늦게 받아도, 몇 % 할인 받지 않는다 해도 정가로 책을 사는 일인데 그리 급할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창원 주택가로 이사 왔을 때 한 5분 거리에 젊은 오누이가 하던 북카페 형식의 작은 서점이 있었습니다. 그 서점이 있어 저는 이 동네와 빨리 친숙해졌습니다. 운영도 꽤 잘했습니다. 입소문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곧 북카페는 접고 다른 문화공간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제일인 듯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정부 단위의 지원보다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동네마다 작은 서점 하나가 있다는 것은 주민에게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을 찾아가 아이에게 원하는 책을 고르게 하는 일은 아이의 일생에 큰 가르침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두고두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20세기가 끝날 때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책’을 정했습니다. 그렇다고 서점의 주인공은 책이 아닙니다. 책을 읽어야할 당신입니다. 

 

[국제신문 2020.11.13 아침숲길 - 정인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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