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책 한 권을 읽으면 사람 한 명이 생겨난다
안녕하세요. 저는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연극과 뮤지컬 대본을 쓰고 연출합니다. 공연 일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읽는 시간보다는 쓰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도서관의 초청을 받았을 때 많이 고민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는 분들이고, 그렇다면 분명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책 읽기에 쓰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이런 부담스러운 얘기 말고, 제가 책을 왜 읽었는지를 편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많은 시간 혼자였습니다. 외둥이였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습니다. 저희 동네 골목에서는 늘 또래들이 놀고 있었지만, 저는 사람 눈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탔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어머니를 졸라서 동전을 들고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제가 걱정스러우셨나 봅니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삼국지가 한 권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삼국지 1권을 다 읽으면 100원을 주고, 2권을 다 읽으면 200원, 3권을 다 읽으면 300원을 주겠다고. 삼국지는 총 10권이었습니다. 1권을 읽어야만 2권을 사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벌써부터 오락실 화면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100원을 받기 위해 책의 첫 장을 넘겼습니다. 오락실 화면이 사라지고 거대한 대륙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저는 분명 방에 혼자 있었지만 소설 속 영웅호걸들이 방 안 가득 찬 느낌이었습니다. 몇 시간 후, 1권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야 오실 것이고, 아무리 빨라도 다음 날은 되어야 2권을 읽을 수 있을 수 있을 터였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었습니다. 너무 읽고 싶은 나머지 제멋대로 이리저리 2권을 상상했습니다. 상상을 하다 보니 훌쩍 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시자마자 2권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놀람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1권 내용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이야기꾼처럼 떠들어댔습니다. 아버지는 곧바로 닫힌 동네 서점에 달려가서 2권을 사다 주셨습니다(알고 보니 두 분은 친구였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날 2권을 읽느라 밤을 샌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아버지를 붙잡고 2권 이야기를 신나게 한 기억이 있으니까요. 아버지는 제 손을 잡고 어젯밤 그 서점에 들러서 3권을 사주셨습니다. 수업 시간에 읽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시면서요. 아버지 친구인 서점 아저씨는 “어젯밤 2권을 사 갔는데 오늘 아침 3권을 사 간다. 대단하다”며 과장 섞인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칭찬이 기분 좋으셨나 봅니다. 그날 이후 다음 책을 살 때마다 제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보란 듯이 책을 사주셨으니까요. 책을 다 읽었다고 말씀드리면, 관객처럼 앉아서 내용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신나게 얘기하면 적절한 반응과 감탄사로 추임새를 넣으시며 제 이야기를 더 신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책을 읽기보다, 책 읽은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해주기가 더 재밌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반 친구들과도 삼국지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고, 어느새 ‘재밌는 애’가 되어버렸습니다. 책 읽은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재밌는 애가 되어버렸어요. 저는 그 ‘재밌는 애’의 타이틀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분명 ‘책 읽기의 즐거움’으로 독서를 시작했지만 어느새 ‘이야기 들려주기의 즐거움’으로 독서 목적이 바뀐 것이죠. 어쩌면 제가 이야기 만드는 일로 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그때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저는 좋은 책을 읽으면 그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친한 사람들한테 불쑥 선물하곤 합니다. 그 책이 누구에게 가장 어울릴지 상상하면서요. 그 생각을 하며 가방에 책을 넣으면 하루종일 두근거립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고 싶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저는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사람 한 명이 생겨난다는 믿음을 가지면서요. 감사합니다.(서울시에 있는 어느 도서관 초청 강연 때 들려준 이야기)
[2024.01.04. 조선일보 오피니언 |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