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97회 - " 최인호가 가고 한 시대가 저물고 다음 시대는 안 보이고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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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7
작가 최인호의 부음(訃音)은 갖가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학창 시절 문예반의 추억까지 얹힌다. 김승옥보다 한발 더 나아간 참신한 문장과 감수성이 까까머리들에게 대인기였다. ‘시장 끝에서부터 끝까지 바람은 매서웠다. 겨울은 도처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술꾼’), ‘스푼이 그의 의식의 녹을 벗기고, 비늘 번뜩이는 물고기처럼 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타인의 방’)….
젊은 최인호가 문단에 가한 충격파를 이만재는 ‘실명소설 최인호 이야기’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우거지 궁상의 선비문학으로 시대의 변천과 관계없이 별세계를 쌓던 개화기 이래의 낡은 흙담들이 ‘무서운 아이’의 종횡무진한 발길질에 무참히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무너지는 소리의 굉음은 이제 더 이상 거짓 양반이기도, 거짓 선비이기도 싫은 새로운 세대의 파죽과 같은 봉기(蜂起)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 페이스북 친구 몇몇은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아! 한 시대가 갔습니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최인호는 변호사이던 부친이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소설을 생각하느라 가난을 슬퍼한 적도 없었으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는’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그 이외의 희망은 품어본 적도 없었다(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 “중·고교 시절 공부는 뒷전인 채 하루에 단편소설 하나를 쓸 정도로 습작에 매달렸고, 책가방 속엔 소설을 쓰기 위한 노트와 펜 하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고교 2학년 신춘문예 입선이라는 희귀한 기록의 이면엔 이런 치열함이 숨어 있었다.
만년의 최인호는 작가인 동시에 구도자였다. 황순원(1915~2000)·서정주(1915~2000)·김기창(1913~2001)이 차례로 타계한 후 쓴 수필에서 그는 고인들에 대한 칭송과 매도가 엇갈리는 세태를 비판한다. 당나라 선승 조주가 장례식 행렬을 보며 “하나의 살아 있는 사람을 여러 죽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구나”라고 탄식한 일화를 인용한다. 그러면서 “고인들이 모차르트인지 살리에리인지, 붙박이별인지 떠돌이별인지는 그들을 망각의 어둠 속으로 떠나보내 잊어버린 후에야 판가름 난다”고 일갈한다. “죽은 사람들을 빨리 잊어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최고의 예의”라고 했다(산문집 『꽃밭』).
그렇다고 우리가 쉽게 최인호라는 거목을 잊을 수 있을까. 마음에서까지 떠나보낼 수 있을까. 문학이 피폐해진 시대. 최인호의 타계로 한 시대가 저문 것은 분명한데, 다음 세대가 뒤를 이었다는 증거가 뚜렷하지 않기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중앙일보 2013.9.27 분수대 -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