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28회 - " 나이 먹는 건 단순미래, 마음먹는 건 의지미래 "

영광도서 0 645


서울시장 후보 네 명에게 물었다. “가장 재밌게 본 영화는?”(중앙일보 3월 29일자) ‘닥터 지바고’와 ‘벤허’가 두 표씩 나왔다. 세상에 영화가 수없이 많은데 중복이라니. 게다가 ‘감명 깊게’가 아니라 ‘재밌게’ 본 영화다. 이미지를 고려한 전략적 답변? 그런데 수긍이 간다. 겹치기로 응답한 후보들은 재미의 기억을 공유한 ‘우리’ 세대였다.

 ‘우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한극장으로 단체관람을 갔다. 70㎜ 대형 화면에 소년들은 압도당했다. 벤허, 십계,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 장장 3시간, 아니 4시간. 재미와 감동이 없었다면 극장은 ‘극기 훈련장’의 준말이었을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도레미 송’ ‘에델바이스’는 음악시간에 합창으로 불렀다. 대령의 큰딸과 남자친구가 듀엣으로 부르는 ‘16 going on 17’은 ‘봄날’ 같은 노래다. 무슨 얘기냐고? 추억의 책가방을 뒤져보자. 과학시간에 까다로운 암기사항이 있었다. 근시냐, 원시냐에 따라 렌즈의 종류와 망막, 수정체와의 관계가 복잡했다. ‘16 going on 17’의 멜로디는 가사 붙이기에 적당했다. “나는 근시 오목렌즈 안구가 깊어 망막 앞에서 상이 맺히네. 수정체가 볼록해.”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너는 원시 볼록렌즈 안구가 얕아 망막 뒤에서 상이 맺히네. 수정체가 오목해.” 이렇게 외웠을 것이다.

 극장에 줄 서서 들어가던 16~17세 소년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동문회에 안 가도 볼 수 있는 곳이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이다. 양친 모두 생존해 계신 경우는 희귀하고 자녀들은 결혼하기 시작했다. “넌 늙지도 않냐?” 오랜만에 만나면 이런 인사 듣는 친구가 한둘 있다. “뭘 안 늙어? 나도 자세히 보면 쭈글쭈글해.” 얄미운 그 녀석에게 보복이 가해진다. “걱정 안 해도 돼. 아무도 널 자세히 안 보니까.”

 자세히 보려면 이제 안경을 코끝으로 살짝 내려야 한다. 친구들이 그 장면을 놓칠 리 없다. “너도 어쩔 수 없구나.” 같이 늙어간다는 게 안심이 되나 보다. “옛날엔 양쪽 다 1.5였는데.” 시력이 힘을 잃은 순간에 노래가 부활한다. “나는 근시 오목렌즈 안구가 깊어.” 아, 봄날은 간다. 세월은 엄격하던 담임을 닮았구나. 안구도 수정체도 평등하게 만들어 주시다니.

 노래만큼 특산물 소개가 흥미로운 ‘전국노래자랑’은 출연자의 나이를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프로다. 요즘 최고 인기곡은 ‘내 나이가 어때서’다. 굴비를 매일 먹은 사람이건 멸치만 먹고 산 사람이건 시간 앞에선 공평한 대우를 받는다.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어 부르던 시절에 단순미래, 의지미래라는 말을 배웠는데 당시엔 헷갈렸다. 이제는 구별이 된다. “나이 먹는 건 단순미래, 마음먹는 건 의지미래. 오래 사는 건 단순미래, 젊게 사는 건 의지미래.”

[2014.3.31. 중앙일보 분수대 - 주철환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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