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83회 - " ‘거절의 윤리, 거절의 에티켓’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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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나는 거절의 에티켓에 능숙하지 못하다. 멋지고 세련되게 거절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부득이하게 거절의 뜻을 표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장 큰 걱정은 상대방이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질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섭섭해하거나 나를 싫어할까 봐 어떤 일을 덜컥 떠맡으면 그때부터 더 크나큰 마음고생이 시작된다.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아닐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것은 거절의 ‘태도’지 거절 자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을 표현하며 거절 의사를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성숙한 사람들은 정중한 거절 앞에서 순순히 물러날 줄 안다. 예의 바른 사람들은 어떤 부탁을 할 때 거절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대에게 결코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기다림의 묘미를 안다. 한 번 거절을 당하더라도 기지를 발휘해 첫 제안보다 훨씬 매력적인 두 번째 제안을 내놓기도 한다. 상대의 거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교양과 성격이 드러나는 셈이다.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거나 비방하는 사람,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자기비하를 일삼으며 세상을 탓하는 사람은 스스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거절하는 사람 또한 거절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태도는 정중하되 의도는 명확하게 밝혀야만 한다. 거절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나중에 큰 고통을 치르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명쾌하게 거절 여부를 밝히는 것이 낫다.
거절을 제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상대의 거절을 곧 인생의 실패로 확대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감정노동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여성의 거절’을 ‘밀고 당기기’ 혹은 ‘수줍은 예스’로 잘못 해석하는 데서 오는 온갖 심각한 트러블을 예방할 수 있다. 여성이 ‘싫다’고 하면 두말없이 물러나주는 것이 멋진 남자의 에티켓이다. ‘왜 날 거절하지?’ 하고 고민하며 온갖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모적인 감정노동이다.
세계적인 작가 스티븐 킹은 출판사의 원고 거절 편지를 하도 많이 받아 그 거절 편지를 한데 모아 못으로 박아 놓고 그 편지 뭉치를 쳐다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거절 편지가 워낙 많이 쌓여 못이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커다란 대못을 구해와 편지들을 다시 꽂아두었을 정도였다. 강인한 사람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가슴 아픈 거절 앞에서도 치유와 성장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거절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도 있다. 첫째, 취업의 거절을 비롯한 각종 불합격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좀 더 예의와 존중을 갖춰 사람들에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거절을 하더라도 상대의 미래와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최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 상대방이 단지 이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일 뿐인데 인생 전체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처럼 깊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도록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둘째, 데이트폭력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거절 의사나 이별의 의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거절은 협상의 여지가 없다. 여성의 거절은 다른 무엇의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완전한 거부 의사’다. 억지나 완력으로 여성의 거절을 무시한다면 그런 남성은 결코 어떤 아름다운 인간관계도 맺을 수 없다.
셋째, ‘일’을 부탁하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예의도 있다. 우리가 거절하는 것은 어떤 ‘제안’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정중한 거절이 뜻밖의 인연이 돼 훗날 더 좋은 인연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 나도 ‘함께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거절할 때가 있고 출판사도 나의 원고를 거절할 때가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거절 편지를 주고받던 출판사와 뜻밖에 좋은 인연을 맺은 경우도 많았다.
잊지 말자. 우리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거절하는 이에게는 ‘거절의 윤리와 에티켓’이, 거절당하는 이에게는 ‘거절을 지혜롭게 해석하는 능력과 거절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2015.8.15 중앙일보 - 삶의 향기]
가장 큰 걱정은 상대방이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질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섭섭해하거나 나를 싫어할까 봐 어떤 일을 덜컥 떠맡으면 그때부터 더 크나큰 마음고생이 시작된다.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아닐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것은 거절의 ‘태도’지 거절 자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을 표현하며 거절 의사를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성숙한 사람들은 정중한 거절 앞에서 순순히 물러날 줄 안다. 예의 바른 사람들은 어떤 부탁을 할 때 거절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대에게 결코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기다림의 묘미를 안다. 한 번 거절을 당하더라도 기지를 발휘해 첫 제안보다 훨씬 매력적인 두 번째 제안을 내놓기도 한다. 상대의 거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교양과 성격이 드러나는 셈이다.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거나 비방하는 사람,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자기비하를 일삼으며 세상을 탓하는 사람은 스스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거절하는 사람 또한 거절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태도는 정중하되 의도는 명확하게 밝혀야만 한다. 거절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나중에 큰 고통을 치르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명쾌하게 거절 여부를 밝히는 것이 낫다.
거절을 제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상대의 거절을 곧 인생의 실패로 확대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감정노동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여성의 거절’을 ‘밀고 당기기’ 혹은 ‘수줍은 예스’로 잘못 해석하는 데서 오는 온갖 심각한 트러블을 예방할 수 있다. 여성이 ‘싫다’고 하면 두말없이 물러나주는 것이 멋진 남자의 에티켓이다. ‘왜 날 거절하지?’ 하고 고민하며 온갖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모적인 감정노동이다.
세계적인 작가 스티븐 킹은 출판사의 원고 거절 편지를 하도 많이 받아 그 거절 편지를 한데 모아 못으로 박아 놓고 그 편지 뭉치를 쳐다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거절 편지가 워낙 많이 쌓여 못이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커다란 대못을 구해와 편지들을 다시 꽂아두었을 정도였다. 강인한 사람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가슴 아픈 거절 앞에서도 치유와 성장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거절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도 있다. 첫째, 취업의 거절을 비롯한 각종 불합격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좀 더 예의와 존중을 갖춰 사람들에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거절을 하더라도 상대의 미래와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최대한 배려를 해야 한다. 상대방이 단지 이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일 뿐인데 인생 전체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처럼 깊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도록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둘째, 데이트폭력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거절 의사나 이별의 의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거절은 협상의 여지가 없다. 여성의 거절은 다른 무엇의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완전한 거부 의사’다. 억지나 완력으로 여성의 거절을 무시한다면 그런 남성은 결코 어떤 아름다운 인간관계도 맺을 수 없다.
셋째, ‘일’을 부탁하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예의도 있다. 우리가 거절하는 것은 어떤 ‘제안’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정중한 거절이 뜻밖의 인연이 돼 훗날 더 좋은 인연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 나도 ‘함께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거절할 때가 있고 출판사도 나의 원고를 거절할 때가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 거절 편지를 주고받던 출판사와 뜻밖에 좋은 인연을 맺은 경우도 많았다.
잊지 말자. 우리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거절하는 이에게는 ‘거절의 윤리와 에티켓’이, 거절당하는 이에게는 ‘거절을 지혜롭게 해석하는 능력과 거절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2015.8.15 중앙일보 - 삶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