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89회 - " 한국어의 가치 "
영광도서
0
569
2016.12.01 13:08
솔직히 요즘은 대학에서 강의 준비하기가 전에 비해 쉬워졌다. 경희대 회기동 캠퍼스에서 가르칠 때만 해도 수업 준비와 진행을 한국어로 하다 보니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물론 충분히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지만 서른한 살 때 배운 탓에 발음이 썩 좋지는 못하다. 이제는 영어로 강의를 하게 되면서 토론도 더 활기를 띤다. 영어 강의가 부담스러운 일부 학생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말이다.
국제대학원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그중 대다수가 한글에 대한 기초가 거의 없어 한글 교재를 읽을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한글로 된 자료를 이용한 연구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학 측에선 국제대학원 학생이라면 영어를 통한 수업과 숙제를 당연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어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며 이는 전적으로 한국어 실력 탓이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도쿄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던 때로, 상당한 수준의 일본어 실력을 갖추려 전 과목을 일어로 수강했고 석사 학위 논문도 일어로 작성했다. 도쿄대에 갔을 때만 해도 내 일본어 실력은 볼품없었다. 그러나 매일 20~70쪽가량의 독서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자연히 실력이 늘었다. 이 매서운 시련이 일본 체류 시 수박 겉핥기로 일어를 배우는 대다수 미국인과 나 사이를 갈랐다.
. 경희대의 외국인 학생들은 혹독한 한국어 교육을 받지 못해 큰 피해를 본다. 사실 국제대학원을 졸업하는 데는 고급 한국어가 요구되지도 않는다. 한국에선 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마스터하거나 최소한 배워야 한다는 기대심리 자체가 없는 듯하다.
외국 학생들이 특정 용어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인이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외국 학생들은 한국어를 의욕적으로 배우려 들지 않는다. 한국에선 으레 외국인 하면 영어만 가능하며 비록 한글을 좀 익혔다 해도 그렇고 그런 수준으로 여기는 듯하다. 만일 한국인들이 외국인은 한국어를 잘 구사해야 하며 거의 내국인 수준의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외국인의 한국어 실력도 급속히 늘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은 영어를 쓰는 게 당연하고 또 영어를 써도 실생활에 불편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의 직장생활은 전혀 딴판이다. 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모르면 한국에서 취업이 불가능하다. 특유의 조직문화에서 살아남으려면 상당 수준의 한국어 구사가 필수적이다.
비록 한국 회사가 아무리 국제화됐다고 해도 조직과 행정 측면에선 여전히 한국적이다. 한국 회사가 더 국제화돼야 하며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을 더 많이 채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자주 들린다. 물론 그런 움직임도 도움은 되겠지만 한국 기업에서 성공의 필수요소가 한국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기업들이 간혹 외국인을 대표로 영입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한국어 실력을 중시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차세대 기업이라면 한국인 수준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며 한국적인 환경에 잘 융화되는 외국인이 필요하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한국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돼야 제격 아닐까.
기업이든, 대학이든, 정부기관이든 한국의 조직에선 상당한 수준의 한국어 실력 없이는 일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실내 간판은 영어로 쓰여 있을지라도 시스템은 한글로 굴러간다. 수업 시 제1언어로 영어를 쓰도록 규정한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슬픈 현실’은 해외 한국 전문가들의 어설픈 한국어 실력으로 이어진다.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고문으로 일할 당시 나의 한국어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싱크탱크들이 개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해 보면 한글로 된 신문과 책을 수시로 읽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한다. 한글 자료 조사는 고사하고 “안녕”이란 말도 못하는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이 한국의 정치·안보·경제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모습을 자주 봤다.
혹자는 아마도 한국이 국력이 약해 외국의 한국 전문가들에게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로 된 자료를 읽으라고 요구할 힘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독일·프랑스·인도 등지의 한국 전문가들에게 한국어를 잘 알아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혹독한 한국어 교육을 시켰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대미 로비에 드는 자금을 늘리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돈은 낭비되기 십상이다. 한국에 대해 무지한 미국의 현 세대에게 로비를 하기보다는 한국을 잘 아는 차세대 집단을 기르는 데 투자하는 게 더 실속 있지 않을까.
한국인들은 완벽한 한국어로 학술 발표가 가능한 미국인 한국 전문가를 기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절대 그렇지 않다. 엄격하게 외국인한테 고수준 한국어 실력을 요청해 봐야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겠다.
[중앙일보 2015.10.10 임마누엘 칼럼-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