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99회 - " 흙수저를 땅에 묻으세요 "

영광도서 0 563
자신을 흙수저라 부르는 건 자기 비하이자 모욕
남 탓하지 말고 행동으로 불합리 구조 혁파해야


졸업시즌입니다. 대학(또는 고등학교) 문을 나서는 청년 여러분, 한걸음 더 세상으로 내딛게 됐습니다.

“기대가 크죠? 희망을 향해 달려가세요.”

예전 같으면 이런 격려를 많이 받았을 겁니다. ‘도전하는 청춘.’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이 말, 지금은 쑥 들어갔습니다.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두려움이 앞서는 건 당연합니다. 드넓은 세상으로 나설 때 불안하지 않을 사람은 없지요. 희망과 설렘이 담긴 두려움과 앞이 꽉 막힌 공포는 차이가 큽니다. 끝이 안 보이는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은 불안감. 여러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해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죠. 창업을 생각해 봐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죠. 오죽했으면 여러분이 딛고 있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헬조선’ ‘지옥불반도’라고 부를까요.

주변을 둘러보면 화도 날 겁니다. 정규직으로 취업한 친구를 보면 뭔가 ‘빽’이 있거나, 부모 잘 만난 것 같고. 누구는 ‘금수저’ 입에 물고 나왔는데, 나는 ‘흙수저’ 씹고 허덕댄다며 세상을 원망하겠죠.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생각해 봅시다. 나를 흙수저 물고 나온 사람으로 깎아내리는 건 나에 대한 ‘모독’ 아닐까요. 그 흙수저를 물려준 것으로 된 나의 부모는 뭐가 되는 겁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고맙고 소중한 게 어머니·아버지 아닌가요. 그분들에게 나 또한 귀중한 존재입니다.



청년,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물론 조건이 다 같다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무조건 “하면 된다”는 과거의 구호를 외치는 게 해법이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흘러간 유행가가 됐습니다. 굳이 이런저런 통계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세대가 지날수록 학력과 계층, 직업의 대물림이 굳건해진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태어난 곳을 헬조선으로 비하하고 신세 한탄 한다고 지옥불반도가 천국불반도가 되겠습니까. 뒷담화는 그만두고 나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노력하는 만큼 성취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 말입니다.

먼저 무기력에서 벗어나세요.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든다면 사회는 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행동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죠. 그 첫걸음이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올 4월 13일입니다. 여러분의 한 표는 세상을 바꿉니다. 보수도 좋고, 진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반걸음이라도 앞장서는 후보를 고르세요. 그동안의 통계를 보면 청년의 투표 참여율이 무척 낮습니다.

4년 전 19대 총선을 볼까요. 당시 선거인 수는 4018만 명이었습니다. 이 중 54.4%(2185만 명)가 투표를 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인 수의 10% 정도를 표본 추출해 조사한 결과 20~30대 투표율은 40%대에 그쳤습니다. 반면에 50세 이상의 투표율은 60%가 훌쩍 넘었습니다.

실제 투표한 인원을 따져 볼까요. 당시 60세 이상은 총 586만 명 정도 투표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50대도 486만 명이 투표장에 나갔습니다. 50대 이상 투표자 수가 1000만 명을 넘습니다. 20대 투표자 수를 볼까요. 고작 281만 명입니다. 30대 투표자 수도 383만 명에 그칩니다. 20~30대의 한 표 값어치가 떨어지는데 어떤 후보가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까요. 노인 인구는 앞으로 더 늘어납니다. 이들은 투표장으로 나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당당히 요구할 겁니다. 후보는 한 표를 얻기 위해 이들의 주의·주장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떤가요. 행동하지 않는데 청년을 위한 일자리는 누가 만들어 줍니까.

두 번째 실천은 ‘연대’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세대 전쟁’이란 말이 일반화됐습니다.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누리니 청년의 일자리가 없다. 기성세대는 청년의 일자리를 뺏는 탐욕의 무리다.’ 이런 프레임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잘못됐습니다. 세대 관계는 ‘적대’가 아니라 ‘연대’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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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절망하는 원인을 기성세대의 기득권에서만 찾는 논리는 음험합니다. 대기업 귀족노조의 철밥통이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이건 일부에 그칩니다. 기성세대를 사회 불평등의 뿌리로 여기는 프레임은 오히려 불평등 문제를 희석시킵니다. 전쟁은 적과 하는 겁니다. 세대 전쟁을 한다면 내가 굴복하거나, 윗세대가 쓰러져야 포성이 멈춥니다. 한쪽이 무너져야 할 정도로 갈등의 날이 선 사회가 청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윗세대와 어깨동무하세요. 경험을 배우고 그들과 협력하세요. 불합리한 구조를 혁파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돈키호테는 몽상가지만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용기와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를 주제로 만든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impossible dream)’이라는 노래가 흐릅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이게 내가 가는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이제 흙수저를 땅에 묻으세요.

[중앙일보 2016.2.3 세상읽기 - 김종윤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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