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삶의 속도를 돌아보다

영광도서 0 570

요즘은 뒷산에 가는 일이 즐겁다. 말이 산이지 워낙 야트막해서 언덕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서 약수를 떠오는 일이 내게 기쁨을 안겨준다. 시원한 약수를 떠와서 차를 끓여 마시는 일도 좋다. 상수리나무 새잎이 가득한 산길을 걷다보면 더러는 꿩이 울고, 또 더러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아카시아꽃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찔레꽃이 피어난 것도 반갑게 본다.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걸어가면서 풍경을 즐기고, 바깥의 그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나의 마음속에 앉히기도 한다. 그러면 조금은 바쁜 마음이 쉬고, 뭉쳐있던 근심도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언젠가 식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움직임이 필요할 때 어느 정도의 속도를 좋아하느냐고. 아이들은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처럼 높낮이의 변화가 있는 길을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릴 때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고, 아내는 “뭔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속도가 좋은 것 같아요. 주변을 볼 수 있는 정도요. 표정의 바뀜을 볼 수 있는 정도요”라고 말했다. 나도 아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생각도 그 나이 무렵에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내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도 꽤나 빠른 속도를 즐겼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 내리막길을 냅다 달리는 것을 좋아했고, 어디를 갈 때에도 가장 빨리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물론 어떤 일에 대한 결정도 굼뜨지 않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속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선호하는 삶의 속도에 변화가 생겼다. 더디게, 천천히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많아졌다. 급행보다는 완행의 교통수단을, 곧바로 난 길보다는 구불구불한 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둘레길이나 바닷길, 농로와 같은 곳을 이리로 저리로 따라 걷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마음을 쓸 때에도 한 호흡 늦추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나를 둘러싼 안과 밖이 조금씩 더 잘,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유자효 시인은 시 ‘속도’에서 이렇게 썼다. “속도를 늦추었다/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이 짧은 시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빠르기를 뒤지게 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세계는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빠른우편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의 책장을 너무 급하게 넘기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자가 그의 제자 공손축(公孫丑)에게 들려준 얘기도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와서는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나는 매우 피곤하다. 내가 벼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달려가서 보니 벼 싹이 말라 있었다. 이에 맹자는 공손축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하에 벼 싹이 자라도록 억지로 조장(助長)하지 않는 자가 적으니, 유익함이 없다 해서 버려두는 자는 비유하면 벼 싹을 김매지 않는 자요, 억지로 조장하는 자는 벼 싹을 뽑아놓는 자이니, 이는 비단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다.” 맹자가 이 얘기를 한 까닭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에 힘쓰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호연지기는 의리(義理)를 축적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의리의 쌓임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의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송나라 사람의 조급증을 오늘날의 우리도 버리기가 어렵다. 

  

 

 

법정스님이 생전에 조카에게 보낸 편지글들을 읽었다. 편지글들 가운데 내게 인상적이었던 글은 조카가 집에 화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스님께서 크게 기뻐하며 답장으로 쓴 것이었다. 스님께서는 “앞마당에 화단이 생겼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꽃을 가꾸는 그 고운 마음씨는 얼마든지 높이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소중하고 위대하게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이처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작은 화단을 가꾸는 일은 삶의 속도를 식물이 움직이고 자라는 속도에 맞추는 일일 것이다. “씨앗이 자라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서는 공포만이 자랄 뿐 안심은 없습니다.” 이 말은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의 것인데, 우리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빠른 속도로 주행하는 삶의 도로 위에 세워놓은 속도제한 표지판 같은 것이기도 하다. 

 

 

[2018.5.23 중앙일보 - 마음산책 | 문태준 시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