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깨달은 성자도 실수하는 이유

영광도서 0 596

십 대 시절부터 나는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고 싶어 했다. 그땐 우리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저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 소위 말하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이 삶이 목표라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 시절 나는 인간의 몸을 받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좀 낯설고 힘겹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영적인 깨달음에 더 목말라 했던 것 같다. 

  

내 안에 ‘나’와 여러 ‘나들’이 공존

단지 깨달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게 수행


비록 그때의 나는 어리고 어리숙했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좋은 스승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성 관련 책의 저자를 찾아가 스승에 대해 묻기도 하고, 유명한 스님들의 법회를 쫓아다니며 듣기도 하고, 당시엔 드물었던 요가원에 다녀보기도 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분의 단체에 가입해 수행도 해보았다. 다행히 구도의 길에서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그분들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인도에 가서 영적 구루들과 달라이 라마 존자님과 같은 큰 어른들을 뵙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만나는 스승 한 분 한 분을 우러러보면서 존경하는 마음, 믿음의 마음, 찬탄하는 마음이 컸다. 마치 그분들이 살아계신 부처님 같았고, 또 그렇게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내가 찾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고자 종교학과로 대학원 전공을 선택하면서 종교를 좀 더 객관적으로 깊게 공부하게 되었다. 특히 종교를 철학적·윤리적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닌 역사적인 관점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종교적 가르침의 훌륭한 면만 주로 보려고 했는데, 역사 속에서의 종교는 너무도 정치적이면서 세속적이라 실망스러운 부분들도 많았다. 더불어 내가 존경해왔던 훌륭한 스승들의 모습 안에서도 완벽하지 않은 여러 실망스러운 모습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께서 왜 그런 모습을 보이셨을까 하는 질문이 어린 가슴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고민의 시간을 보내다 내가 좀 더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 안에는 일관성 있는 하나의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잘 모르는 여러 개의 ‘나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좋아하는 ‘빛’과 같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 같은 또 다른 모습이 내 안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림자의 나’는 우리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서 본인 스스로도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수행이 깊은 사람도 자기 안의 그림자와 마주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인간적 욕구나 보살핌 받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큰 실수를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또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냥 살게 되면 이상하게도 나와 비슷한 그림자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이 유독 내 눈에 잘 보인다. 즉 내가 어떤 타입의 사람들을 너무 싫어한다거나 계속해서 비난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는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와 유사한 숨은 욕망은 없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그림자를 인지하고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된다. 단순히 이원적인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빛과 그림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 이 둘은 좋고 나쁨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없는 상호 의존하면서도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인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성자라면 그림자와 같이 어둡고 더러운 것은 내치고 밝고 깨끗함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포용하면서도 둘 다에게 물들지 않는 자신의 참모습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기에 어떤 나쁜 상황을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자기가 한 말처럼 자기 행동을 하는 일 같다. 나는 불혹이라는 나이를 지나서야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앙일보 2019.8.21 - 마음산책 | 헤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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