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62회 - " 중년의 의미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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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가을도 마지막 한 주를 남겨놓고 있다. 겨울 문턱이라고는 하지만 계절의 실감이 예전만큼 뚜렷한 건 아니다. 한파만 닥치지 않는다면 난방이 된 실내에서 다른 계절과 큰 차이를 못 느끼며 생활하는 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계절이 바뀌더라도 실내온도의 편차는 크게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만큼 둔감해지는 건 자연스럽다. 초등학교 때 교실 난로를 지피기 위해 아침마다 당번 학생이 연탄을 나르던 일이 새삼 낯설게 기억될 정도다. 보온도시락을 갖고 다니는 아이가 많아질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양은도시락을 난로에 얹어놓았다가 점심시간에 따끈하게 먹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 같으면 모두가 추억 속에만 있는 ‘체험’ 대상이다.
옛날얘기를 잠시 꺼낸 건 아무리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더라도 저물어가는 가을이 중년이란 나이에 대해 새삼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에 대한 감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엔 오십을 일컬어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육십을 넘긴 ‘청년’들도 드물지 않다. 통계상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간주하므로 그 이전까지는 넓게 보아 중년이다. 대략 마흔에서 예순까지의 연령대다. 조금 실감나게는 한창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중년에 속한다.
중년의 용도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중년은 이례적인 시기다. 대개 생물종들의 생애주기는 성장기와 생식기(번식기), 그리고 짧은 생식후기로 이루어진다. 자신과 같은 DNA를 가급적 많이 퍼뜨리는 게 모든 생물종의 자연사적 사명이기에, 생식기 이후의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으로 간주된다. 극단적으로는 교미 뒤에 바로 암사마귀의 먹잇감이 되는 수사마귀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암사마귀보다 사냥도 못하는 수사마귀가 새끼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영양분이 되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생식 이후의 시기로서 긴 중년을 갖는 건 인간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핵심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긴 성장기를 갖는다는 점에 있다. 탄생 이후 생식기에 진입하기까지의 기간을 성장기라고 한다면 인간의 성장기는 유례없이 길다. 더구나 생물학적 성숙이 이루어진 뒤에도 자녀를 갖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부양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추가시간이 성장기에 포함된다. 생식기 이후의 중년이 갖는 생물학적 용도는 이렇게 긴 성장기를 갖는 자녀가 생식기에 진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는 데 있다. 자녀의 사교육비와 학자금 때문에 등골이 빠진다는 한국 학부모들의 모습이야말로 중년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까. 그렇게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나면 우리에겐 여생으로 노년이 남는다. 의학의 발달로 노년이 연장되긴 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나이다. 손주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걸로 노년의 용도를 새롭게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건 물론 모든 생명체를 ‘DNA 운반체’로 규정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사적 사명을 떠안은 생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신적 삶을 향유하는 예외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이 예외성은 자연적 본성이나 DNA의 명령에 거스르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입시를 앞둔 자녀들을 보살피는 데만 온힘을 쏟느라 머리가 세고 등골이 빠지는 대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자연사적 사명 외에 다른 의미를 유한한 삶 속에서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도 ‘반란’이라면 반란이다. 생물학적 명령에 반기를 들고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이 반란의 요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거창할 건 없다. 정신적 삶은 독서하는 삶이다. 어떤 부작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중년의 뇌는 가장 똑똑한 뇌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한다. 기억력만 다소 떨어질 뿐 판단력이나 이해력에 있어서 성장기를 능가한다. 독서의 최적기가 있다면 바로 중년인 것이다. 중년이라고 해도 평균수명을 고려해보면 이제 반 고비를 좀 지났다. 지나온 과거가 한 세대이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도 한 세대다. 중년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만하다.
[2014.11.25. 중앙일보 삶의 향기 - 이현우 북 칼럼니스트]
옛날얘기를 잠시 꺼낸 건 아무리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더라도 저물어가는 가을이 중년이란 나이에 대해 새삼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에 대한 감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엔 오십을 일컬어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육십을 넘긴 ‘청년’들도 드물지 않다. 통계상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간주하므로 그 이전까지는 넓게 보아 중년이다. 대략 마흔에서 예순까지의 연령대다. 조금 실감나게는 한창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중년에 속한다.
중년의 용도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중년은 이례적인 시기다. 대개 생물종들의 생애주기는 성장기와 생식기(번식기), 그리고 짧은 생식후기로 이루어진다. 자신과 같은 DNA를 가급적 많이 퍼뜨리는 게 모든 생물종의 자연사적 사명이기에, 생식기 이후의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으로 간주된다. 극단적으로는 교미 뒤에 바로 암사마귀의 먹잇감이 되는 수사마귀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암사마귀보다 사냥도 못하는 수사마귀가 새끼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영양분이 되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생식 이후의 시기로서 긴 중년을 갖는 건 인간만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핵심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긴 성장기를 갖는다는 점에 있다. 탄생 이후 생식기에 진입하기까지의 기간을 성장기라고 한다면 인간의 성장기는 유례없이 길다. 더구나 생물학적 성숙이 이루어진 뒤에도 자녀를 갖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부양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추가시간이 성장기에 포함된다. 생식기 이후의 중년이 갖는 생물학적 용도는 이렇게 긴 성장기를 갖는 자녀가 생식기에 진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는 데 있다. 자녀의 사교육비와 학자금 때문에 등골이 빠진다는 한국 학부모들의 모습이야말로 중년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까. 그렇게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나면 우리에겐 여생으로 노년이 남는다. 의학의 발달로 노년이 연장되긴 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나이다. 손주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걸로 노년의 용도를 새롭게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건 물론 모든 생명체를 ‘DNA 운반체’로 규정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사적 사명을 떠안은 생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신적 삶을 향유하는 예외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이 예외성은 자연적 본성이나 DNA의 명령에 거스르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입시를 앞둔 자녀들을 보살피는 데만 온힘을 쏟느라 머리가 세고 등골이 빠지는 대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자연사적 사명 외에 다른 의미를 유한한 삶 속에서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도 ‘반란’이라면 반란이다. 생물학적 명령에 반기를 들고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이 반란의 요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거창할 건 없다. 정신적 삶은 독서하는 삶이다. 어떤 부작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중년의 뇌는 가장 똑똑한 뇌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한다. 기억력만 다소 떨어질 뿐 판단력이나 이해력에 있어서 성장기를 능가한다. 독서의 최적기가 있다면 바로 중년인 것이다. 중년이라고 해도 평균수명을 고려해보면 이제 반 고비를 좀 지났다. 지나온 과거가 한 세대이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도 한 세대다. 중년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만하다.
[2014.11.25. 중앙일보 삶의 향기 - 이현우 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