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91회 - "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지지 않기를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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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운암(韻岩)에게.
누군들 하늘의 핏줄이 아닐 수 없네. 이 원숙한 가을 하늘 아래 서서 지그시 눈 감은 그 어둠 속으로 해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네. 오로지 독수리의 눈만이 해를 똑바로 눈 뜨고 본다고 하네.
허나 달밤에는 내 두 눈 뜨고 달을 조상으로 우러러보다가 그리운 임으로 바라보기도 하네. 저 고대 아낙네의 ‘정읍사’가 생각나네.
기원전 2천5백년 이래 이처럼 해와 달의 운행주기로 이 세상의 태양력 태음력이 그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시행되었네. 그런 나머지 태양태음력이라는 복합력(曆)도 생겨났네.
그 이래 사람들의 한 생애마다 생일이 있고 제일(祭日)이 있게 되었네. 하루와 한 달과 한 해가 있네.
올해도 이슥하게 한 해를 다하고 있네. 10월이면 곧 11월이네. 가을이면 바로 늦가을이자 첫겨울이네.
현재란 그것이 유일한 실재라면 끝내 그 실재는 부재가 되네. 현재라는 이름을 갖자마자 바로 과거의 일부가 되지 않는가. 존재와 무가 동행하는 실존 개념의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네.
아메리카 한 원주민은 1년의 끄트머리 12월을 ‘남의 달’이라고 한다네. 그렇다면 이에 앞서 11월은 굳이 ‘나의 달’이겠네. 나의 달이란 내가 나 자신의 삶에 태양의 기본주기(基本週期)를 통한 반성과 회한을 품어보는 마지막이기도 하네.
나의 달, 나의 날은 어떤 원경(遠景)보다 근경 속으로 나 자신의 시야를 내면화할 것이네. 그래서 밤하늘의 별도 내 심상의 별로 내려오지 않는가. 이런 근친의 정서는 하늘 아래의 한반도가 대륙으로 이어진 어제오늘의 접변(接變)을 만나게 하네.
오래전 압록강을 노래한 적이 있네. 그곳에 가지 않고 내 염원 속의 강을 노래한 것이네.
지난여름 동행의 우애로 그 강의 무심(無心)을 거슬러 갔네. 북쪽 기슭에서 저 건너 조국산천의 풍경을 무성영화의 벙어리 화면으로 바라보았네. 금동아 은동아 하고 부르면 왜 그려 하고 금방 대답할 동족의 지척(咫尺)임에도 서로 삭막할 따름이었네.
착잡했네. 사나운 긴장과 막힌 배척이 불가피한 분단의 생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네. 하지만 동북아시아 한반도 전사(全史) 2천몇백년의 시간 속에서는 한 매듭일 뿐이라는 씁쓸한 자위도 생겨나네.
옛적에는 온통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이 광대한 지역의 수륙(水陸)에 그 기함(氣陷)을 떨친 바 있네. 고구려라는 이름은 몇 가지 풀이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 우렁찬 이름의 명분을 이은 고려가 정작 제2 고구려이기보다는 차라리 ‘최고의 아름다움(高麗)’이라는 미학의 명사로 달라진 것을 말하겠네.
고려는 옛 고구려로 강력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로 되고 말았네.
그런 고려의 수도 개경의 외항 벽란도는 활짝 열린 국제항구였네. 대륙을 잃은 대신 바다를 열었네. 송나라 장사꾼은 물론 왜인과 남만인 그리고 천축인 서역인도 시끌벅적 국제무역을 펼치는 곳이었네. 고려가요 ‘쌍화점’의 회회아비가 바로 거기에 기류하는 아랍인이었네.
이런 나라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심미적인 애수를 머금은 고려청자를 빚어낸 경지는 남송(南宋) 청자의 품위를 훨씬 능가하였네.
시인 조지훈의 한국예술론에서 고대의 ‘힘의 예술’과 ‘꿈의 예술’ 그리고 고려의 ‘슬픔의 예술’에 이어 근세조선의 ‘멋의 예술’을 설정한 사실은 탁월하네. 또한 그 아름다움의 주조(主調)를 고전 낭만 자연의 특색으로 파악한 사실로 근대예술론을 앞서고 있네. 장차는 고대의 ‘힘’과 ‘꿈’의 합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개척할 과제도 내다보는 한반도 미학의 경륜이겠네.
나는 세계에서 오직 한반도만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향유한다고 외치는 어리석음을 내 어리석음으로 삼지 않네. 그렇다면 ‘고려’라는 아름다움의 세계란 지극히 상대적이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서나 이루어지고 어디에서나 이루어지지 않는지 모르네.
지구의 생명 등장 49억년 이래의 세월을 쌓아온 지상에서 5백만년 전 인류가 태어난 이래의 세월은 어디에 담겨 있는지도 모를 최단기간이네. 이런 우주의 허허망망한 시공 속에서 어떤 목적들도 가능하지 않은 인류의 태초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은 없었네.
우연한 단세포가 우연한 다세포로 그리고 우연의 바다에서 우연의 뭍으로 기어 나온 그 오랜 우연의 난관으로 지상의 생명체가 있게 되었네. 그 진화 역시 어떤 의도도 없이 다만 자연현상의 무아(無我)였네. 석기시대가 그 이전 시대에 대해서 무슨 필연이겠는가.
어디에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본능이 빙하기 간빙기의 가혹한 시대 속에서 나왔겠는가. 동아시아의 태곳적 뱀(龍)과 새(鳳)가 그냥 살아냈듯이 ‘북경원인’도 그냥 산 것이네.
척박한 기생(寄生)으로 자연의 폭력을 견디어내는 동안 그 공포와 방어가 삶의 희로애락을 만들어냈네. 이런 생존의 긴 역정을 통해서 인류는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움을 낳게 되었네.
일찍이 예술을 모방설이나 주술설이나 몇 가지로 그 발생단계를 말하고 있네.
동북아시아 황하유역에서도 상고시대 황제(黃帝)는 해가 하늘에 떠있는 듯이 훤하고 눈썹이 가지런한 미남이었네. 이것은 저 고대인도 석가모니를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완전한 미(美)로 추앙하는 것과도 어금버금이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먼저 권력이나 성역(聖域)에 해당한 것이네. 이런 충성과 귀의를 표현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했네. 빼어난 여성의 문신이나 장신구 역시 지배층에서 시작했네.
그래서 높은 신분의 환경에는 으레 5색구름과 5색석(五色石)이 배치되었네. 서기(瑞氣)와 길상(吉祥)의 미학이 거기서 생겨났네.
히말라야 남쪽 인도신화 속의 브라흐마는 딸 사라스와티를 낳았는데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 딸을 아내로 삼았네. 아름다움이 부녀를 부부로 바꿔버린 것이네.
인도나 중국의 이 같은 원시미학이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례는 자연 속의 여러 기이한 체험을 생존의 기술로 삼을 때마다 발전시켜 온 것이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미와 선을 구별하지 않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는 합성어를 사용하였네. 이를테면 그 자연미학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윤리적인 미학을 터득한 것이네.
한국의 예술론에서 말하는 힘과 꿈, 슬픔과 멋의 개념들은 오늘의 미적 전망에서 하나의 유전적 동기가 되지만 1백년 이상의 자아와 세계를 추구해온 오늘의 심미의식에서는 새로운 모험 앞의 기억일 따름이네.
장차의 아름다움은 시장의 상품 논리를 이겨냄으로써 근대의 삼위일체인 진·선·미의 사명을 재생시켜야 하겠네. 그 재생은 진의 최선과 선의 차선에 뒤따르는 바가 아니라 진과 선의 불완전성이나 그 미제(未濟)를 넘어서는 종합으로서 미를 달성하네. 미는 진과 선의 가치의 완성이겠네.
나는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지 못했는가를 새겨보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했는가라는 뜻이기도 하네.
삶과 예술 앞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미달일 뿐이네. 그것은 예술의 차원과 함께 현실의 차원에서도 그렇다네.
그래서 예술의 미완성성은 완성의 개념이 세속화될수록 도외시하기 십상이겠네.
누가 가을의 석양처럼 완벽하고 완전하며 그처럼 완성의 경지를 이루겠는가. 아름다움이란 진과 선을 단 한번으로 종합하는 가치가 아니라 골백번도 더 그것들과의 합치를 고통스럽게 진행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나는 아름다움만이 이 세상 궁극의 목표가 되는 것도 경계하네. 추상은 자주 구상에의 기억을 반추해야 하겠네.
차라리 어떤 미학도 의식하지 않는 삶의 희로애락이 더 아름다움의 육친이지 모르네.
운암.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지지 않기를 함께 빌어야겠네.
[중앙일보 2015.10.23 고은의 편지 - 고은 시인]
누군들 하늘의 핏줄이 아닐 수 없네. 이 원숙한 가을 하늘 아래 서서 지그시 눈 감은 그 어둠 속으로 해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네. 오로지 독수리의 눈만이 해를 똑바로 눈 뜨고 본다고 하네.
허나 달밤에는 내 두 눈 뜨고 달을 조상으로 우러러보다가 그리운 임으로 바라보기도 하네. 저 고대 아낙네의 ‘정읍사’가 생각나네.
기원전 2천5백년 이래 이처럼 해와 달의 운행주기로 이 세상의 태양력 태음력이 그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시행되었네. 그런 나머지 태양태음력이라는 복합력(曆)도 생겨났네.
그 이래 사람들의 한 생애마다 생일이 있고 제일(祭日)이 있게 되었네. 하루와 한 달과 한 해가 있네.
올해도 이슥하게 한 해를 다하고 있네. 10월이면 곧 11월이네. 가을이면 바로 늦가을이자 첫겨울이네.
현재란 그것이 유일한 실재라면 끝내 그 실재는 부재가 되네. 현재라는 이름을 갖자마자 바로 과거의 일부가 되지 않는가. 존재와 무가 동행하는 실존 개념의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네.
아메리카 한 원주민은 1년의 끄트머리 12월을 ‘남의 달’이라고 한다네. 그렇다면 이에 앞서 11월은 굳이 ‘나의 달’이겠네. 나의 달이란 내가 나 자신의 삶에 태양의 기본주기(基本週期)를 통한 반성과 회한을 품어보는 마지막이기도 하네.
나의 달, 나의 날은 어떤 원경(遠景)보다 근경 속으로 나 자신의 시야를 내면화할 것이네. 그래서 밤하늘의 별도 내 심상의 별로 내려오지 않는가. 이런 근친의 정서는 하늘 아래의 한반도가 대륙으로 이어진 어제오늘의 접변(接變)을 만나게 하네.
오래전 압록강을 노래한 적이 있네. 그곳에 가지 않고 내 염원 속의 강을 노래한 것이네.
지난여름 동행의 우애로 그 강의 무심(無心)을 거슬러 갔네. 북쪽 기슭에서 저 건너 조국산천의 풍경을 무성영화의 벙어리 화면으로 바라보았네. 금동아 은동아 하고 부르면 왜 그려 하고 금방 대답할 동족의 지척(咫尺)임에도 서로 삭막할 따름이었네.
착잡했네. 사나운 긴장과 막힌 배척이 불가피한 분단의 생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네. 하지만 동북아시아 한반도 전사(全史) 2천몇백년의 시간 속에서는 한 매듭일 뿐이라는 씁쓸한 자위도 생겨나네.
옛적에는 온통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이 광대한 지역의 수륙(水陸)에 그 기함(氣陷)을 떨친 바 있네. 고구려라는 이름은 몇 가지 풀이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 우렁찬 이름의 명분을 이은 고려가 정작 제2 고구려이기보다는 차라리 ‘최고의 아름다움(高麗)’이라는 미학의 명사로 달라진 것을 말하겠네.
고려는 옛 고구려로 강력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로 되고 말았네.
그런 고려의 수도 개경의 외항 벽란도는 활짝 열린 국제항구였네. 대륙을 잃은 대신 바다를 열었네. 송나라 장사꾼은 물론 왜인과 남만인 그리고 천축인 서역인도 시끌벅적 국제무역을 펼치는 곳이었네. 고려가요 ‘쌍화점’의 회회아비가 바로 거기에 기류하는 아랍인이었네.
이런 나라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심미적인 애수를 머금은 고려청자를 빚어낸 경지는 남송(南宋) 청자의 품위를 훨씬 능가하였네.
시인 조지훈의 한국예술론에서 고대의 ‘힘의 예술’과 ‘꿈의 예술’ 그리고 고려의 ‘슬픔의 예술’에 이어 근세조선의 ‘멋의 예술’을 설정한 사실은 탁월하네. 또한 그 아름다움의 주조(主調)를 고전 낭만 자연의 특색으로 파악한 사실로 근대예술론을 앞서고 있네. 장차는 고대의 ‘힘’과 ‘꿈’의 합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개척할 과제도 내다보는 한반도 미학의 경륜이겠네.
나는 세계에서 오직 한반도만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향유한다고 외치는 어리석음을 내 어리석음으로 삼지 않네. 그렇다면 ‘고려’라는 아름다움의 세계란 지극히 상대적이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서나 이루어지고 어디에서나 이루어지지 않는지 모르네.
지구의 생명 등장 49억년 이래의 세월을 쌓아온 지상에서 5백만년 전 인류가 태어난 이래의 세월은 어디에 담겨 있는지도 모를 최단기간이네. 이런 우주의 허허망망한 시공 속에서 어떤 목적들도 가능하지 않은 인류의 태초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은 없었네.
우연한 단세포가 우연한 다세포로 그리고 우연의 바다에서 우연의 뭍으로 기어 나온 그 오랜 우연의 난관으로 지상의 생명체가 있게 되었네. 그 진화 역시 어떤 의도도 없이 다만 자연현상의 무아(無我)였네. 석기시대가 그 이전 시대에 대해서 무슨 필연이겠는가.
어디에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본능이 빙하기 간빙기의 가혹한 시대 속에서 나왔겠는가. 동아시아의 태곳적 뱀(龍)과 새(鳳)가 그냥 살아냈듯이 ‘북경원인’도 그냥 산 것이네.
척박한 기생(寄生)으로 자연의 폭력을 견디어내는 동안 그 공포와 방어가 삶의 희로애락을 만들어냈네. 이런 생존의 긴 역정을 통해서 인류는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움을 낳게 되었네.
일찍이 예술을 모방설이나 주술설이나 몇 가지로 그 발생단계를 말하고 있네.
동북아시아 황하유역에서도 상고시대 황제(黃帝)는 해가 하늘에 떠있는 듯이 훤하고 눈썹이 가지런한 미남이었네. 이것은 저 고대인도 석가모니를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완전한 미(美)로 추앙하는 것과도 어금버금이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먼저 권력이나 성역(聖域)에 해당한 것이네. 이런 충성과 귀의를 표현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했네. 빼어난 여성의 문신이나 장신구 역시 지배층에서 시작했네.
그래서 높은 신분의 환경에는 으레 5색구름과 5색석(五色石)이 배치되었네. 서기(瑞氣)와 길상(吉祥)의 미학이 거기서 생겨났네.
히말라야 남쪽 인도신화 속의 브라흐마는 딸 사라스와티를 낳았는데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 딸을 아내로 삼았네. 아름다움이 부녀를 부부로 바꿔버린 것이네.
인도나 중국의 이 같은 원시미학이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례는 자연 속의 여러 기이한 체험을 생존의 기술로 삼을 때마다 발전시켜 온 것이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미와 선을 구별하지 않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는 합성어를 사용하였네. 이를테면 그 자연미학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윤리적인 미학을 터득한 것이네.
한국의 예술론에서 말하는 힘과 꿈, 슬픔과 멋의 개념들은 오늘의 미적 전망에서 하나의 유전적 동기가 되지만 1백년 이상의 자아와 세계를 추구해온 오늘의 심미의식에서는 새로운 모험 앞의 기억일 따름이네.
장차의 아름다움은 시장의 상품 논리를 이겨냄으로써 근대의 삼위일체인 진·선·미의 사명을 재생시켜야 하겠네. 그 재생은 진의 최선과 선의 차선에 뒤따르는 바가 아니라 진과 선의 불완전성이나 그 미제(未濟)를 넘어서는 종합으로서 미를 달성하네. 미는 진과 선의 가치의 완성이겠네.
나는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지 못했는가를 새겨보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했는가라는 뜻이기도 하네.
삶과 예술 앞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미달일 뿐이네. 그것은 예술의 차원과 함께 현실의 차원에서도 그렇다네.
그래서 예술의 미완성성은 완성의 개념이 세속화될수록 도외시하기 십상이겠네.
누가 가을의 석양처럼 완벽하고 완전하며 그처럼 완성의 경지를 이루겠는가. 아름다움이란 진과 선을 단 한번으로 종합하는 가치가 아니라 골백번도 더 그것들과의 합치를 고통스럽게 진행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나는 아름다움만이 이 세상 궁극의 목표가 되는 것도 경계하네. 추상은 자주 구상에의 기억을 반추해야 하겠네.
차라리 어떤 미학도 의식하지 않는 삶의 희로애락이 더 아름다움의 육친이지 모르네.
운암.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지지 않기를 함께 빌어야겠네.
[중앙일보 2015.10.23 고은의 편지 - 고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