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67회 - " 융 · 복합 교육, 명저를 읽게 하라 "

영광도서 0 465
융·복합 교육이 대세다. 발빠른 대학은 아예 융·복합 교육과정을 신설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융·복합 교양과목을 개설하는 대학은 드물지 않다. 아직 검토 중인 대학에서도 최소한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철학과 문학, 사학과 사회학 등 인접 학문을 왕래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과 이학, 예술과 공학 등 현행 학문 분류로는 '사돈의 팔촌'쯤 되는 학문을 융합해 배우고 연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교육의 뒤에는 '르네상스적 인간'에 대한 동경이 자리한다. 탁월한 과학자요 화가였던 다빈치처럼 우리 시대에도 개인의 상이한 재능을 꽃피워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리란 기대. 그런데 융합이란 단어에서 읽히듯, 이는 다분히 기술지향적이다.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뛰어난 인문적 상상력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나, 삼성이 최근 인문계 졸업생 200명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뽑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도 융·복합 대세론을 뒷받침한다. 인문계 졸업생들의 대기업 취직길이 확대된 셈이니 전국의 인문학도에게는 희소식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대학에서 교양 교육을 맡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대세론이 썩 탐탁지 않다. 전인성에 대한 추구는 분명히 교양 교육의 이상이므로 중요한 가치로 공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융·복합은, 편견을 무릅쓰고 비유하자면, 유전자공학의 결과로 탄생할 신품종을 고대하면서 그 유전적 부모에 대해서는 모르쇠하는 태도랄까, 어딘가 얌체 같은 구석이 있다. 유전적 부모인 야생의 종에 대한 정보는 데이터베이스에 있으니 그대는 기술의 요구를 따르라! 근래 각 기관에서 내놓은 융·복합 교육안을 보아도 무얼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뿌리보다 '열매'를 탐하려는 태도는 지난 정부의 '녹색 성장'처럼 기이하다.필자는 식량위기와 생명공학의 윤리, 동양철학과 서양의학의 관계를 학생들이 깊이 있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근본을 되짚는 배움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 이 진지한 성찰의 결과로 분과학문(전공)의 한계에서 벗어나 개별 지식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어우러지며 또 갈라지는지 근대 지(知)의 역사를 거슬러 여행할 수 있다. 지적으로도 흥미롭다. 그 결과 식탁이 건강해지고 병원 문턱이 낮아진다면 이 또한 금상첨화다.

그런데 이러한 융·복합 교육이 성공하려면 먼저 원전을 읽어야 한다. 결국 책을 읽으라는 얘기냐고? 조금 다르다. 융·복합 교육을 하려면 대학이 책을 읽혀야 한다는 얘기다. 많은 대학이 시행 중인 영어인증제처럼 융·복합 과정용 독서인증제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반발이 있을 것이다. 자발적 독서도 아니고 강제로 책을 읽으라니 최첨단 분야에서 왜들 이러시나요? 불만도 쏟아질 게다.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을 읽혀야 한다는 이유는 미래가 과거로부터 뻗어오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저서는 당대의 르네상스적 인재들이 최고의 혜안으로 문명의 길을 예측한 선물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낸 이 불후의 명작에는 '종의 기원'을 비롯해 '에밀', '슬픈 열대', '침묵의 봄' 등 오늘날 최적의 융·복합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수요론에 밀려 빠르게 폐강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개설했던 '명저 읽기'와 '독서 토론' 등은 문명의 미래를 모색하는 훌륭한 교과목이었다. 시나브로 거기에 융합형 인재가 되는 길이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취업 교육에 '올인'하는 요새 학생들은 그 기회마저 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꽃 좋고 열매도 많다는데, 교육 100년을 내다보며 좀 기다려도 되지 않겠는가.

[부산일보 2013.4.25 기고 - 김주현 인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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