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71회 - " 숭례문이 애원한다 다시는 작은 불씨 큰 화마로 키우지 말라고 "

영광도서 0 404


5일 오전 9시 숭례문 앞 건널목. 한 무리의 관광객이 몰려오더니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눈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였다. 아니나 다를까, 모처럼 한국을 찾은 재미교포 일가다. 가장 어른인 황모씨. 80이 넘었다는데 호리호리한 몸매에 걸음이 재다. 마침 5년 만에 복구된 숭례문의 첫 일반 개장을 맞아 들렀단다. “나 어릴 때는 이렇지 않았어. 일본 놈들이 다 바꿔놓은 거야.” 함께 온 아내 김모씨가 받는다. “이게 원래 모습이래요. 지난번 빅 파이어로 홀랑 탄 걸 이번에 제대로 고쳤대.” 사위쯤 되는 젊은이가 되묻는다. “빅 파이어?” “그래 큰 불. 성금 받아서 다시 지은 거야. 큰 의미가 있는 거야.”

 숭례문 광장 입구엔 벌써 70~8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문화재청 직원이 팸플릿을 나눠준다. 황씨 일가의 수군거림이 이어진다. “이게 국보 1호래” “불에 홀랑 탔다며 그래도 국보 1호야?” “워낙 중요한 문화재니까.” “그런 중요한 걸 왜 홀랑 태웠대?”

 숭례문이 다시 열렸다. 더불어 숭례문을 둘러싼 두 가지 숙제도 재등장했다. 하나는 해묵은 국보 1호 논란이다. 일제 강점기 때 아무 의미 없이 정해진 국보 1호 자리인 만큼 내놓아야 한다는 쪽과 그냥 둬야 한다는 쪽이 근 20년째 팽팽히 맞서왔다. 이번에도 일단 국보 1호 유지로 결론 났지만, 재논의 주장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불에 탔다는 게 또 하나의 빌미가 됐다. 2005년 불탄 낙산사도 복원됐지만 보물에서 해제됐다.

 다른 하나는 대형 화재의 교훈이다. 복기해보자. 2008년 2월 그날, 숭례문을 무너뜨린 건 작은 불씨 하나였다. 그 불씨가 왜 대형 화마(火魔)로 커졌던가. 책임 실종, 우왕좌왕 때문이었다. 소방차는 물만 뿌려댔다. 지붕을 뜯고 들어갔으면 불을 끌 수도 있었지만 안 했다. 문화재 파손 책임을 안 지려고 서로 미룬 탓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정부 정책에도 빗댔다. “(숭례문처럼) 큰 불이 나면 불부터 꺼야 한다. 이때 물을 좀 많이 뿌릴 수도, 화단을 밟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불을 끄고 나면 물 많이 썼다고, 화단 밟았다고 죄를 묻는다. 이게 반복되면 불 끄기보다 화단 안 밟기, 물 적게 쓰기만 신경 쓰게 된다. 이른바 면피 제일주의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 창업국가를 얘기한다. 이때 꼭 필요한 게 패자부활전이다. 그러려면 실패와 실수가 무사(無事)와 안일보다 대접받는 세상이 돼야 한다. 납작 엎드린 채 눈만 떼굴떼굴 굴리다 제 밥그릇만 챙기는 게 지혜요, 좋은 처세술로 인정받는 지금의 풍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창업국가는 요원하다는 얘기다. 5월의 햇살 아래 숭례문이 묻는 듯하다. 두 가지 해묵은 숙제, 풀어낼 준비는 돼 있느냐고.

[중앙일보 2013.5.6 분수대 - 이정재 논설위원]




숭례문의 어제와 오늘

숭례문이 5년3개월 만에 복구됐다. 조선 태조 5년에 창건된 이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전쟁 등 숱한 전란(戰亂)을 꿋꿋이 견뎌낸 숭례문은 2008년 2월 한 방화범의 불질로 석축만 남긴 채 무너지고 말았다.

 예(禮)자는 5행의 불, 5방의 남쪽을 가리킨다. 세로로 쓰인 숭례(崇禮)는 치솟는 불꽃(炎)을 뜻하는데,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성문과 달리 현판을 종서(縱書)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진 천하의 명필도 방화 전과자의 미친 불질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숭례는커녕 비례(非禮)를 넘어 무례(無禮)도 이만저만이 아닌 역사 부정의 만행이었다.

 네로 황제는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지른 뒤 광기에 휩싸여 키타라를 뜯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방화꾼들은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탐미(耽美)와 정화(淨化)의 희열에 온몸을 떤다지만, 시커먼 재로 변한 숭례문의 잔해 앞에서 우리의 가슴은 마치 영혼이라도 도둑맞은 듯 아프게 타들어갔다.

 불이 나자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은 국보 1호에 대한 외경심 때문인지 초기에 적극적인 진화작업을 펼치지 못하고 불길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앞서 시청 앞 광장의 개방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얻은 서울시는 화재감지기나 경보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숭례문을 덜컥 개방했고, 관리책임을 맡은 중구청은 경비용역 계약을 체결하면서 누전이나 방화로 인한 손해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면책약정까지 했다고 한다. 인기에 눈먼 포퓰리즘 행정은 국보 1호의 소실로 이어졌다.


 문화재의 수난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양양의 낙산사와 창경궁의 문정전,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서장대 누각이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는 50년 가까이 물살에 깎여가는 중이다.

 문화재는 한낱 유물이 아니다. 그 자체가 시푸르게 살아 숨쉬는 역사다. 탈레반이 인류 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폭파했을 때, 전 세계 지성들은 그 충격적 반달리즘 앞에 경악했다. 깨진 것은 바윗덩어리였지만 사라진 것은 역사요 날아가버린 것은 문화였기에.

 선진국들은 문화재를 국가의 핵심 기반(Critical Infrastructure)으로 지정하고 각개의 문화재마다 개별적으로 특화된 재난방지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복구된 숭례문에는 스프링클러, 열 감지기, 폐쇄회로 카메라 등을 두루 갖췄다지만 국보의 운명을 기계장치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웅숭깊은 역사의식,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문루(門樓)에 깃들어야 한다.

 역사는 복제될 수 없다. 그러나 숭례문의 복구는 단순 복제가 아닌 원형 그대로의 부활이요, 뛰어난 장인(匠人)들이 온갖 정성을 기울인 예술이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소중하다. 일제(日帝)가 헐어버린 기단(基壇) 양쪽의 성곽도 원래 모습을 되찾아 역사 복원의 뜻을 두텁게 했다.

 다만 숭례문이 언제까지 국보 1호의 상징성을 지킬 것인지는 의문이다. 무엄하게도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 일제는 숭례문을 조선 고적 제1호로 지정했는데, 그것이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이어졌다. 숭례문이 대문이라면 경복궁은 본채다. 중건(重建)된 본채를 제쳐두고 새로 세운 대문을 국보 1호로 계속 남겨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온다.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그런가 하면 국보에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앞으로 범국민적인 논의가 요망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문화재 보호에만 소홀했던 것이 아니다. 자학(自虐)의 붓에 증오의 먹물을 찍어 써내려간 이데올로기 역사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상을 헐뜯는 역사왜곡의 불질 앞에 우리 청소년들이 벌거숭이처럼 노출돼 있다. “사람은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야 남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나라도 스스로 해친 뒤에야 남의 손에 망하게 된다(夫人必自侮然後人侮之… 國必自伐而後人伐之).” 맹자의 경고가 섬뜩하다.

 복구돼야 할 것은 숭례문만이 아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역사의식에도 성찰 깊은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나라와 역사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숭례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역사교육이 바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600년 서울을 지켜온 어제의 숭례문이 남쪽의 화기를 막아냈다면, 오늘의 숭례문은 ‘서울 불바다’를 노리는 북쪽의 화기를 빈틈없이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온 국민이 숭례문의 수문장(守門將)이다

[중앙일보 2013.5.6 중앙시평 - 이우근 법무법인 충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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