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92회 - " 젊은 연인 "

영광도서 0 399


내 어머니께선 지금 내 나이 때 당신의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셨다. 지난봄,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으셨을 때 문득 그 사실이 떠올랐다. 벌써 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니! 아무리 출가한 승려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어머니가 안 계시는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황막하게 밀려오는 허전함을 어찌 채울까 싶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부침 속에서 상처를 다독이는 곳은 어머니의 품이며,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더라도 끝까지 자식 편에 서는 존재가 어머니이지 않는가. 그런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따스한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리라.




 가만 생각해보니 출가 후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득 한 어른 비구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도 도우면서 승려라는 이유로 일부러 부모님을 멀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마음먹었다. 올여름에는 꼭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같이 가는 거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또 계속 미루고 미루다 영원히 함께 여행을 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행 장소는 내가 이십대 때부터 줄곧 부모님 모시고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둔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정했다. 그 장엄하고 맑은 풍경을 꼭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려고 하면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이유들이 생긴다. 아버지는 하시던 일을 열흘이나 비우는 것이 어렵다고 주저하신다. 어머니도 혹시 그때까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신다. 나 또한 은사 스님 절의 소임을 최근에 많이 미루어왔던 터라 대중 스님들과 신도님들의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떠나야만 한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법. 최근에 부모님께 드리고자 샀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평생 자유롭게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한탄’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인의 눈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스스로를 옭아맸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뒤통수가 따가워도 무조건 떠나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자유롭게 떠나보면 떠나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하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막상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니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셨다. 평생 부모님과 처자식을 위해 사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열흘간을 연속으로 휴가를 보낸 적이 없으셨다. 여기 오니 한국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분명 아버지께서도 한 번쯤은 일상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으셨으리라. 어머니께서도 건강이 많이 좋아지셔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하고 계셨다. 한국에서 지금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가 유행인데 우리 부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모르셨다며 기뻐하셨다. 두 분 다 시차 적응도 빠르고 새벽에는 한국에서 그랬듯 함께 운동도 하셨다.

 여행이 좋은 점은 무엇보다도 평소에 무감각했던 우리의 오감이 낯선 곳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마치 다시 태어나신 듯 걸어가는 백인 꼬마 아이의 모습만 보고도 감탄하셨고, 지나가는 자동차 가운데 우리나라 차를 발견하면 숨은 보물이라도 찾은 듯 자랑스러워하셨으며, 물과 과일을 사기 위해 들어간 수퍼마켓은 완전 신천지처럼 받아들이셨다.

로키산맥 침엽수림 속에서는 이처럼 신선한 공기 맛은 처음이라며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좀 더 깊이 숨을 들이마시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공기는 어디 가서 돈 주고 구할 수도 없다며 두 분은 더 깊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여행 중에 자전거를 두 시간 동안 빌려 탔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은 주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처럼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 깨어오라아하~” 노래를 부르시는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부모가 아닌 세월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그 순간을 만끽하는 젊은 연인을 보는 듯했다. 부모라는 무거운 책임을 맡기 전, 혼돈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전, 깊은 상처 따윈 없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두 젊은이의 모습 말이다.

 자전거를 잠시 멈추고 벤치에 앉으니 벤치 가운데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내용을 읽어보니 어떤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녀들이 돈을 기부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벤치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훗날 우리가 가고 나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기억해주면 좋겠네”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공기가 정말로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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