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00회 - " 내 아이, 염려보다는 이해를 해주세요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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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13:08
어른들을 바쁘게 바쁘게 만들었던 시간관리하는 회색신사들이 이제는 어린 아이들 마저 바쁘게 만들려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시간을 잘 관리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을 부추깁니다. 해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시간표까지 짜 놓고 그 시간표에 맞추어 살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시간에 쫓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고삐 매여진 송아지처럼 제 자신의 생각은 무시 당하고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 저리 끌려다닙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나보다 잘난 이웃 친구와 비교 당하며 치욕을 겪어야 합니다.
게다가 어른들이 어떤 모범생이란 모델을 정해 놓으면 그 모범생과 똑같이 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붕어빵 기계에서 빠져나오는 붕어빵들처럼 되려고, 공장의 어떤 틀에서 구워져 나온 공산품들처럼 되려고 그렇게 남을 닮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그렇게 닮은 꼴이 되면 훌륭하다, 모범생이다, 성공했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로, 불량학생으로, 실패자도 낙인을 받습니다. 그러니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당연하고, 그렇게 살아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율 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어려서는 바쁘지 않아도 될 텐데도 어른들의 극성으로 아이들도 바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진정한 삶을 배우는 게 아니라 바쁘게 사는 법만 배웁니다. 개성을 배우는 게 아니라 몰개성을 배웁니다. 자율을 배우는 게 아니라 타율을 배웁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하는 데도 매우 어려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는 법이 아니라 세상에 맞춰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똑같은 모양의 사람들이 되려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성공이라 여깁니다. 그러니까 아이 적부터 붕어빵 연습, 공산품 연습만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도 모르고 삶의 의미도 모르고 삽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율을 가르쳐야 합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도 보면 저자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지금 젊은이들과 비슷한 심정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2년, 저자 나이 30대 초반에 당신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보면 ‘염려’ 대신에 ‘이해’와 ‘대화’를 좀 해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아버지는 무기수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아들이 걱정돼 “집안 걱정 말고 몸조심하여라”는 말씀을 자주 편지에 하셨나 보다. 하지만 아들 신영복 선생님 입장에선 몸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본인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그런 이야기 말고 아버지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최근에 읽으신 글들에 대한 소견을 말씀해 달라고 부탁한다. 더불어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사상과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의 청년으로 이해”받고 싶다는 간청이 들어 있다.
이처럼 자식이 부모로부터 염려나 기대가 섞인 말보다는 이해의 따뜻한 시선을 바라는 것은 비단 요즘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의 부모 세대도 젊었을 때는 역시 자신의 부모들이 걱정하는 잔소리가 버거웠고 자신을 자식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주길 바랐었다. 그런데 막상 부모가 되고 보니 내 아이는 나와 쉽게 분리될 수 없는 ‘분신’으로만 느껴질 뿐 독립된 인격체로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내 아이는 결국 아이일 뿐 나이에 걸맞은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 아이의 행동을 정말로 변화시키고 싶으면 염려의 말, 걱정의 잔소리보다는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아이 스스로가 알아서 부모가 걱정하는 부분을 조절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아동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부모의 걱정하는 말은 일방적이고 지시적이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는 데 반해, 내가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 굳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변화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아이돌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는 사춘기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런 아이에게 부모가 “너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만날 아이돌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준 용돈은 사진 사고 음반 사는 데 다 쓰면 어떡하니? 계속 그러면 학교 간 사이에 아이돌 사진 싹 버리고 용돈도 안 준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는 대신 더 격렬하게 반항하고 더 밖으로 돌게 된다. 차라리 “엄마도 어렸을 때 너처럼 멋진 오빠들 많이 좋아하고 따라다니고 그랬어. 공부하는 거 숨 막히고 답답하지. 그 멋진 오빠들 보면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 엄마는 맨날 뭐든 하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공부, 공부, 공부 아니면 돈, 돈, 돈’ 이야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내 마음을 이해해주네, 라는 마음에 집을 좀 더 편안하게 느끼고 예전보단 좀 더 부모랑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중앙일보 2016.3.4-마음산책]
게다가 어른들이 어떤 모범생이란 모델을 정해 놓으면 그 모범생과 똑같이 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붕어빵 기계에서 빠져나오는 붕어빵들처럼 되려고, 공장의 어떤 틀에서 구워져 나온 공산품들처럼 되려고 그렇게 남을 닮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그렇게 닮은 꼴이 되면 훌륭하다, 모범생이다, 성공했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의 낙오자로, 불량학생으로, 실패자도 낙인을 받습니다. 그러니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당연하고, 그렇게 살아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율 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어려서는 바쁘지 않아도 될 텐데도 어른들의 극성으로 아이들도 바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진정한 삶을 배우는 게 아니라 바쁘게 사는 법만 배웁니다. 개성을 배우는 게 아니라 몰개성을 배웁니다. 자율을 배우는 게 아니라 타율을 배웁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하는 데도 매우 어려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는 법이 아니라 세상에 맞춰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똑같은 모양의 사람들이 되려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성공이라 여깁니다. 그러니까 아이 적부터 붕어빵 연습, 공산품 연습만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도 모르고 삶의 의미도 모르고 삽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율을 가르쳐야 합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도 보면 저자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지금 젊은이들과 비슷한 심정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2년, 저자 나이 30대 초반에 당신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보면 ‘염려’ 대신에 ‘이해’와 ‘대화’를 좀 해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아버지는 무기수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아들이 걱정돼 “집안 걱정 말고 몸조심하여라”는 말씀을 자주 편지에 하셨나 보다. 하지만 아들 신영복 선생님 입장에선 몸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본인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그런 이야기 말고 아버지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최근에 읽으신 글들에 대한 소견을 말씀해 달라고 부탁한다. 더불어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사상과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의 청년으로 이해”받고 싶다는 간청이 들어 있다.
이처럼 자식이 부모로부터 염려나 기대가 섞인 말보다는 이해의 따뜻한 시선을 바라는 것은 비단 요즘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의 부모 세대도 젊었을 때는 역시 자신의 부모들이 걱정하는 잔소리가 버거웠고 자신을 자식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주길 바랐었다. 그런데 막상 부모가 되고 보니 내 아이는 나와 쉽게 분리될 수 없는 ‘분신’으로만 느껴질 뿐 독립된 인격체로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내 아이는 결국 아이일 뿐 나이에 걸맞은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 아이의 행동을 정말로 변화시키고 싶으면 염려의 말, 걱정의 잔소리보다는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아이 스스로가 알아서 부모가 걱정하는 부분을 조절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아동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부모의 걱정하는 말은 일방적이고 지시적이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는 데 반해, 내가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 굳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변화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아이돌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는 사춘기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런 아이에게 부모가 “너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만날 아이돌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준 용돈은 사진 사고 음반 사는 데 다 쓰면 어떡하니? 계속 그러면 학교 간 사이에 아이돌 사진 싹 버리고 용돈도 안 준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는 대신 더 격렬하게 반항하고 더 밖으로 돌게 된다. 차라리 “엄마도 어렸을 때 너처럼 멋진 오빠들 많이 좋아하고 따라다니고 그랬어. 공부하는 거 숨 막히고 답답하지. 그 멋진 오빠들 보면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 엄마는 맨날 뭐든 하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공부, 공부, 공부 아니면 돈, 돈, 돈’ 이야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내 마음을 이해해주네, 라는 마음에 집을 좀 더 편안하게 느끼고 예전보단 좀 더 부모랑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중앙일보 2016.3.4-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