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11회 - " 나를 지키는 일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

영광도서 0 594
다산의 형님 정약현은 자신의 서재에 수오재(守吾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 지키는 집이라니, 솔직히 식상하지 않은가. 다산 또한 수오재라는 이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수오재기』에서 다산은 말한다.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항상 나 자신에게 ‘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하지만 유배 생활 중 온갖 고초를 겪으니, 비로소 형님의 깊은 속내가 이해됐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수도,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수도 없으며, 내가 읽은 책이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런데 유독 ‘나’라는 것은 지키기 어렵다. ‘나’는 잠시라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출세에 혹하고, 돈에도 혹하며, 미인에게도 혹해버리기 일쑤다. ‘나’라는 존재는 한번 유혹에 휩쓸리면 다시 돌아오기도 어려우니, 붙잡을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나[吾]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라고 고백한다. 어렸을 때는 출세에 눈멀어 과거 공부에 빠졌고, 과거에 급제하자 비단 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온 세상을 누볐는데, 이제 유배객 신세가 되어 조상의 묘를 버리고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숲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과거를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다산이야말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한 사람임을 알기에, 이 부끄러운 고백은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벼슬자리에 오른 시간보다 유배 기간이 훨씬 길었던 다산조차 이토록 부끄러워하는데, 나는 과연 ‘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베를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그만 엽서 하나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선 적이 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이 구절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가장 원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이토록 고통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사랑이 클수록 실망도 크고 희망이 클수록 절망도 크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함께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수록 성공하지 못할까 봐 느끼는 두려움도 커진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나는 나 스스로를 착취하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바로 이런 나로부터 진정한 나를 지키는 수오재(守吾齋)의 정신이야말로 궁극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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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나는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정말 강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새 ‘싸움의 타깃’을 분명히 하는 생각실험을 하는 중이다. 예컨대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할 때도 사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싫어할 순 없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주장을 싫어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갈등 상황에 대처하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무시무시한 적들과도 한번 맞서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은 내 안에 있었다.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의 안쪽에는 ‘나는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나르시시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싸움의 타깃을 명확히 하자. 나는 오늘 엄청난 무더위와 끝없이 쌓인 일감과 좋은 뉴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무정한 세상 전체와 싸운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싸운 대상은 ‘단 하루라도 일상의 쳇바퀴를 벗어나고 싶다’는 탈출의 열망이었다. 문득 이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다. 당신의 하루는 무엇과 싸우셨는지. 오늘 당신의 어깨를 짓누른 모든 슬픔의 구름이 부디 내일은 말끔히 걷혀지기를. 설령 슬픔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슬픔을 견딜 수 있는 당신 ‘마음의 맷집’만은 두둑해져 있기를.


[중앙일보 2016.6.26 삶의 향기 -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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