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지식과 정보의 ‘애정행각’ 즐기려면 일단 다독 하시라
책을 왜 읽는가? 어떤 이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는다. 프랑스의 비평가 에밀 파게(Emile Faguet)는 말했다. “독서의 적(敵)은 인생 그 자체다. 삶은 질투와 경쟁으로 뒤흔들리고. 우리를 독서를 통한 자기 성찰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질투와 경쟁으로 뒤범벅이 된 사회, 그 모래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다른 매체보다 훨씬 더 책은 독자에게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숨죽여 책에 집중해 있노라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독서가는 참평화를 얻는다. 미국의 작가 수잔 손탁 (Susan Sontag)은 말했다. “독서는 제게 유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이 작은 우주선에 중독된 나머지, 나가서 뛰어놀지 않고 책 읽기에만 매진하다 보면,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느니 자신에게 과몰입해 있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책을 읽는다고 꼭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독서는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데도 유용하지만,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데도 쓸모가 있다. 책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을 떠나 책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독서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권고한 이들이 있다. 중국의 사상가 육상산(陸象山)이나 왕양명(王陽明)에 따르면, 책 읽기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진짜 자신을 잃을 수 있다. 일본의 사상가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는 『만옥담(萬屋談)』에서 “책 읽는 사람은 책에 취한 취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독서는 자기에 취하는 일이 아니라 책에 취하는 일이다.
보르헤스 “다시 읽기, 더 풍요로운 행복”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독서에 몰입할 수도 있고, 자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책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 책의 내용은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한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 행위에 있다.
언어가 풍부해지면, 사회에 나가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더라도 작은 축제와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것저것 머리에 넣어두면, 그것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부딪히고 발효되어, 다채로운 상상을 일으킨다. “설레다”와 “설레발”의 관계는 무얼까. 설사는 항문이 오열하는 것일까. 영어마을을 만들었던 것처럼 영어감옥을 만들면, 학부모들이 앞다투어 자식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굳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인생이 지루하지 않다. 이처럼 지식과 정보가 자기들끼리 애정행각을 하게 하려면, 일단 다독을 해야 한다. 다량의 정보와 자극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풍부한 상상을 누리기는 어렵다.
다독을 한다는 것이 책을 대충 읽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독서가 마음속에 얼어붙어 있는 바다를 깨는 일이라고 했는데, 책을 대충 읽어서 얼음이 깨질 리가 있겠는가. 얼음을 가르려면, 정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책이 과연 제대로 날이 선 도끼란 말인가? 그것을 알려면, 일단 어느 정도 다독을 할 수밖에 없다. 공 점유율이 높아야 골도 넣는 법. 책을 이것저것 오래 점유하고 있어야 정신의 날 선 도끼를 발견할 수 있다.
다독도 해야 하고 정독도 해야 한다니, 그걸 언제 다해요? 이 짧은 인생에 책만 읽다가 죽으란 말인가요? 그럴 리가. 살면서는 책 읽기 말고도, 출근하기, 설거지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멍 때리기, 실없는 얘기 하기, 개소리 참고 들어주기, 가려운 데 긁기 등 다른 할 일들이 많다. 그 와중에 책을 정독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다독을 하여 정독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읽는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정독할 부분을 찾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만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하는 문장들이 바로 정독할 부분들이다. 평소에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질문에 답하는 문장을 찾아낼 감식안이 아예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감식안을 갖춘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선생이 있으라고 만든 곳이 학교다. 만약 자신의 학교에 그런 선생이 아무도 없다면, 그 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다.
정독은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첫째, 그 책의 저자가 침묵하는 내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들은 대개 ‘관심종자’이고, 불치의 관심종자일수록 아무에게나 자기 이야기를 펼쳐 놓지 않는다. 진짜 관심종자는 드러내기보다는 숨긴다. 알아들을 만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모호하게 숨겨 놓거나 은근히 암시만 해둔 진짜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독자는 더 많은 관심을 책에 기울여야 한다. ‘나 잡아봐라’ 놀이의 대가처럼, 저자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유혹하며 독자의 적극적인 관심을 희구한다. 당신의 적극적인 해석 속에서 내 모호함을 분명함으로 바꿔주세요, 침묵을 발화로 바꾸어주세요, 라고.
둘째, 책 내용을 근저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가정과 전제들을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언명은 그 언명을 가능케 하는 전제가 있으며,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그 언명이 담고 있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다. 전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독자는 은연중 저자와 자신이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다른 시대에 쓰인 책은 종종 다른 전제를 갖고 있는 법, 다른 문화권의 상식은 종종 자신의 상식과는 다른 법, 독특한 저자는 종종 독특한 전제를 가지고 있는 법.
‘관심종자’ 저자가 숨긴 내용 읽어내야
셋째, 비판적 독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주장만 접하면, 그 주장이 온통 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비판적 독해를 위해서는 같은 문제에 대해 경쟁하는 다른 주장들을 접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 진리처럼 느껴졌던 주장도 기껏 ‘일리’ 있는 주장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경쟁하는 주장들까지 정성을 들여 전면에 드러내어 놓는 책은 많지 않기에, 독자는 경쟁하는 다른 주장들을 스스로 재구성해가며 읽어야 한다. 그래야 주장의 타당성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다독과 정독을 통해 훌륭한 독서인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꼭 좋은 일만 생기리라는 법은 없다. 인생은 크고 작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법. 누군가 여전히 돈을 떼어먹을 것이며, 갑자기 화장실에서 미끄러질 것이며, 예고 없이 변기는 막힐 것이고, 출근길에 메뚜기 떼의 공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눈 건강이 나빠질 것이다.
조선 후기에 책 꽤나 읽은 사람으로 알려진 유만주(兪晩柱)라는 독서인이 있었다. 그는 1784년 6월 12일 서울에 있는 이씨 성을 가진 의사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해야 책을 계속 읽으면서도 눈이 침침하지 않고 밝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의사가 네 가지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중 세 가지는 따뜻한 김을 눈에 쐬기, 붉은 가루약 넣기, 육식 덜하기인데, 오늘날 보기에 그 효과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책을 읽지 않기’다. 의사는 덧붙인다. “책을 즐겨보는 것은 눈을 해치는 주된 원인이에요.” 엄청나게 무식하지만 아주 건강한 눈알을 가진 채로 늙어 죽고 싶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게 좋다. 독서는 안구 건강에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