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왜 인간은 자기 모순적일까?

영광도서 0 1,020

“하루에 십만 명씩 새로운 코로나 감염자가 생기는 상황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버티는 미국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아요.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 쓰는 것을 가지고 마치 본인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행정 방침으로 여기면서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타자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자신의 상황은 잘 알기에

본인은 항상 예외라고 느껴

 

몇 주 전 미국에 사는 지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아직도 식당이나 커피숍·극장이나 쇼핑몰 같은 실내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는 곳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날씨가 추워지면서 새로운 감염자 수가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니 금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실내 공간으로 들어가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인은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해 대면 수업을 진행하는데, 혹시라도 학교에서 옮거나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옮길까 큰 걱정이라 했다.

 

지인과 통화를 하고 난 다음 날, 나는 코끼리 명상 앱 개발자들이 모인 일터로 출근하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평소보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오전 회의 시간에 늦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빨리 걷다 보니 숨이 찼고, 마스크 안을 가득 채운 더운 숨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코 아래로 내렸다. 시원한 공기가 막힘없이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는 밖이니까, 내 주변엔 사람이 없으니까, 최소한 내 입은 잘 막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곧 그 생각들을 밀어내고 어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차올랐다.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어제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숨이 차다고 마스크를 코 아래로 내린 나를 보니 나 자신이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코 아래로 마스크를 내리고 있었고, 만약 그때 나를 본 사람이라면 분명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분류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전날 그토록 비판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코 위로 마스크를 올렸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계속해서 생각해보았다. 왜 사람은 이토록 모순적인가. 그리고 왜 그리도 쉽게 자기모순을 합리화하는가.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가 자기모순을 합리화하는 배경에는 ‘내 경우는 좀 예외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인 듯하다. 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자세한 맥락을 나 스스로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다 보니 구체적인 이유와 정황을 알 수 없는 타자에 비해 나에 대해서는 ‘다르고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에게도 분명 그만의 이유와 배경이 있을 텐데 나는 잘 알지 못하므로 그들에 대해서는 쉽게 어떤 한 카테고리로 묶어 비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은 본디 모순이 많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모순적인 면모를 찾을 수 없다고 느낀다면, 자신의 무의식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칼 융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가득 담고 있다. 내 눈에 띄는 싫어하는 사람들의 속성이 내 안에도 가능성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그 면면들이 내 눈에 잘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의 이런 모습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모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색깔의 나를 내면 자산으로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러 모습의 나를 통해 창의성을 발휘하며 재미있게 살 수도 있고, 어떤 인생의 상황이 찾아와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해낼 수도 있다. 더불어, 타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나 스스로를 먼저 들여다본다면 좀 더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산도 된다. 성경 말씀처럼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다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항상 가슴에 새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자일수록 본인을 더 죄인이라고 말한다”이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려 나를 먼저 돌아보고 반성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앙일보 2020.11.11 | 마음산책 - 혜민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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