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평범한’ 사람의 책 쓰기

영광도서 0 1,014

요즘 무척 관심 있게,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현상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쓴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이다. 여기서 ‘평범한’은, 그이가 소설가나 시인 같은 전문 글쟁이가 아니고,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이나 문예 창작을 전공하지 않았고, 의사나 법조인이나 교수나 연구자가 아니라는 의미로 썼다.

 

평범한 사람들이 쓴 현장 이야기

고전이 주지 못하는 깨달음 줘

인터넷은 책을 대신할 수 없어

 

이번 칼럼에서 거론하는 서적은 모두 최근 3년 사이에 나왔다. 읽은 책들을 먼저 꼽으면 이렇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김현아), 『나는 그냥 버스 기사입니다』(허혁), 『나는 여경이 아니라 경찰관입니다』(장신모), 『저 청소일 하는데요?』(김예지), 『우리도 교사입니다』(박혜성).

 

각각 간호사·버스기사·경찰·미화원·기간제 교사가 직접 들려주는 현장 이야기다. 고졸에 저소득, 한부모 가정 출신인 20대 저자가 알코올성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아빠의 아빠가 됐다』(조기현)도 인상적으로 읽었다.

 

지금 대한민국 고3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노정석), 현직 소방관이 쓴 『오늘도 구하겠습니다!』(조이상), 20년 가까이 이민 대행 업무를 해 온 저자의 『이민 가면 행복하냐고 묻는 당신에게』(장혜진), 지방 마트 창업기 『이렇게 된 이상 마트로 간다』(김경욱) 같은 책들에도 관심이 간다. 아직 읽지는 못했다. 임시 계약직으로 일하는 노인 노동자들의 존재를 알린 『임계장 이야기』(조정진)도 올해 화제를 모았다.

 

자기표현 욕구는 높아지는데 출판 문턱은 낮아진 게 가장 큰 원인인 듯하다(도서정가제의 영향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독립 출판을 하거나 1인 출판사를 세우는 일이 쉬워졌고, 소셜 펀딩으로 작은 출판사들이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카카오의 ‘브런치’처럼 출간과 연계한 글쓰기 플랫폼도 생겼다.

 

출판사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글항아리는 지난해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는 시리즈를 시작했다. 강성민 대표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이끌어갈 저자들”이라고 밝혔다. 김민섭 작가는 출판사 정미소를 차리면서 “특별하지 않은 이들의 고백의 서사를 책으로 묶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위고·제철소·코난북스 등 작은 출판사 세 곳이 함께 기획한 ‘아무튼’ 시리즈, 북이십일의 ‘아르테S’ 시리즈도 자신의 크고 작은 경험을 책으로 펴내려는 신인 작가들에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혹자는 그 바람에 수준 미달인 책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글쎄. 나는 위에 적은 책들을 읽으며 버스기사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태움’이라는 간호사들의 악습 뒤에 어떤 구조적 배경이 있는지, 한국 복지제도의 사각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그만큼 내가 사는 시대를 더 이해하게 됐다. 이런 종류의 앎은 고전으로는 얻을 수 없다.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 같은 매체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앞에 언급한 책들을 140자로 잘라 트위터에 전문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쉽고 자극적인 토막만 빨리, 넓게, 잠시 퍼졌다가 곧 잊힐 것이다. 맥락 없는 파편 상태로 말이다.  

 

얼마간의 지적 노동을 요하는 ‘따분한’ 부분은 읽히지도, 퍼지지도 않는다. 1년쯤 지나면 검색도 제대로 안 된다.

 

1㎢짜리 자연보호구역 100곳과 100㎢ 규모의 보호구역 한 곳은 다르다. 따로 떨어진 1㎢짜리 보호구역을 아무리 만들어도 넓은 서식지가 필요한 대형 포유류는 거기서 살 수 없다. 멸종한다. 100㎢ 규모의 보호구역 한 곳이 낫다. 지식·지혜, 나와 의견이 다른 이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바로 그 대형 포유류에 해당한다. 그런 깊은 사고를 죽이지 않으려면 다양한 층위의 진실을 담을 수 있는 긴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웹 서핑을 하며 조각난 글들을 읽어봐야 건질 수 있는 통찰은 잘고 드물다. 대개는 박살 난 유리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아는 게 많아졌다고 혼자 착각할 따름이다.  

 

싸구려 분노와 인스턴트 공감에 휘둘리는 건 덤이다. 거꾸로 말하면, 글 토막을 인터넷에 아무리 올려봤자 그걸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용기를 내 책을 써보자.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그런 책들이, 값싼 힐링 대신 경험과 현장과 사연과 맥락이 있는 긴 텍스트가, 지금 우리에게 아주 많이 필요하다. 긴 글을 쓰면 삶도 충만해진다. ‘평범한’ 사람들의 책 쓰기를 응원한다.

 

[중앙일보 2020.11.25 마음읽기 -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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