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94- 정체성,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고요

영광도서 0 467

‘신만은 안다’와 같은 말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프랑스어로 ‘Dieu sait....’는 ‘신만은 ....을 안다’는 뜻이다. 이는 직역이고, 본 뜻 ‘아무도 모른다’로 쓰인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의 주제의식은 이 말에서 비롯된다. 사전적 의미로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을 구명하는 성질, 또는 상당기간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 또는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거나 주관적 실체’를 이른다. 곧 한 마디로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을 말한다. 이 본질이란 쉽게 말하면 존재이유, 그래도 어렵다면 제작자 또는 조물주의 만든 의도이다. 예를 들면 종이컵의 본질은 한 번 쓰고 버리기 위해 만든 것이니, 일회용 컵이 종이컵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인간의 본질 또는 인간 고유의 정체성은 ‘신만이 안다’로 규정 가능하다.

 

때문에 밀란 쿤데라는 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온갖 카메라의 감시를 받는다, 심지어 태내 속의 생명체까지도 들여다본다고 쓴다. 이렇게 드러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난교파티를 벌이는 모습일 테고, 한눈에 내려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둘이 은밀하게 키스한 장면을 한눈으로 추적하면 돌고 돌아 타액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쿤데라는 이 재미있는 발상을 소설로 쓰기 위해 그만의 독특한 패러디를 시도한다. 물론 패러디를 넘어 멋진 창작을 한다. 프랑스의 작가 디드로가 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자크와 그의 주인>으로 바꿈으로써 운명을 떼어내어 보다 가벼운 의미의 자크, 노예지만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그렸던 그는 이번엔 역시 앞선 작가가 쓴 <시라노>를 페러디하되, 자기만의 주제로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자신의 소설에서 이니셜로 C.D.B로 등장시킨다. <시라노>의 내용인 즉 시라노는 자신의 시촌 누이 록산을 사랑한다. 모든 면에서 시적인 감각까지 갖춘 거의 완벽한 시라노는 단 하나 코가 너무 크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것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 사랑 고백을 못하고 끙끙 앓는다. 그런데 록산을 좋아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크리스티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이 부탁하는 연서, 록산을 사랑한다는 편지를 대신 써준다. 그렇게 시작한 이 놀이는 이어지고 끝내 크리스티앙은 덕분에 록산의 사랑을 얻는다. 나중에 불의의 사고로 크리스티앙이 죽고 나서, 시라노 역시 병상에서 헛소리하듯 마지막 편지를 암기하는 것을 목격하고야 그렇게 유려한 편지를 쓴 주인공이 시라노였음을 록산이 알아차린다.

 

쿤데라의 <정체성>역시 ‘더 이상 남자들이 나를 바라보지 않아’라며 우울해하는 자신의 아내 샹탈에게 익명의 편지 놀이를 시작하는 장 마르크를 등장시킨다. 그의 이니셜도 시라노의 이니셜을 따른다. 장 마르크가 우연히 생각해낸 편지의 주인공은 언젠가 샹탈을 유혹하려한 영국인의 별칭을 딴 브리태니쿠스이다. 결국 장 마르크의 편지 놀이는 들통 나고 그는 이별 선고를 받는다. 이러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전후를 덧붙여 쿤데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다.

 

육체, 향수, 우정, 사랑, 운명과 같은 인간의 본질적이자 보편적인 문제를 기억과 연관하여 풀어가면서 정체성을 묻는다. 사회에서 인간이 본유의 얼굴로 살 수 없이, 여러 얼굴로 살아가야 하니, 그 여러 얼굴들 중 하나를 다른 이들은 나로 기억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이미지는 곧 그들이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이다. 언젠가 그 여러 얼굴이 하나의 얼굴로 합쳐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남들이 나의 실체를 알았을 때의 두려움, 때문에 나는 그 모두를 알 수 없는 절대적 죽음을 원한다. 이를테면 화장장에서 깡그리 태워지고 싶다.

 

또한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아요.”라는 샹탈의 우울함, 여자의 노화의 정도는 남자의 시선의 관심과 무관심이 척도라는 걸 아는 장 마르크는 알고 쿤데라는 정의한다. 여자가 원하는 남자의 시선, 그것은 당연히 나를 바라봐야 하는 존재들이 아닌 음흉한 익명의 시선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시선들을 터부시하며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런 시선이 내게 꽂히지 않을 때 우울한 샹탈의 심리를 쿤데라는 발견한 것이다.

 

이를 실험하는 편지 사건은 이제 가공의 정체성의 실체를 보여준다. 장 마르크는 아내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시도로, 아직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우울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샹탈은 그와는 반대로 자신보다 연하남인 장 마르크 역시 이제는 남들처럼 시들은 자신의 외모에 실망하여 자신을 떠날 의도를 가지고 가짜 편지를 자신에게 보낸 것으로 오해한다. 그 결과가 이별을 낳는다. 물론 결론은 긍정적이지만.]

 

다만 이제는 그러면 정체성이란 무엇인지를 찾을 차례이다.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쿤데라의 시도는 역시 거창하게 “역사적으로 경제체제는 일국의 경제체제로서가 아니라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각국의 발전 속도는 그 나라의 위치, 인구, 자원,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압력 등에 영향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국가의 경제발전은 세계 시장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을 응용한다. 즉 이러저러한 이미지들은 결국 어떤 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커다란 유리관에 갇힌 존재들의 타액 공동체이며 난교파티에 불과할 뿐이니, 태아의 태내를 들여다보는 존재처럼 신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진정한 인간의 정체성은 신만이 안다는 뜻이다.

 

신이 자신의 작업장, 곧 신의 아뜰리에에서 만들 때 의도한 존재이유와 존재가치, 그것만인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란 뜻이리라. 셍텍쥐페리가 “완전이라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떼어낼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듯이, 본질의 문제는 곧 모두를 떼어낸 것으로, 너는 누구냐 물으면 나는 나도 모르는 것이 있으니 ‘신만이 아신다.’라고 대답할밖에.

 

쿤데라는 말한다. 신은 인간을 신에게 살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으니,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찾으라 하지 않고 번성하라고 했다고. 그러니 성교하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존재일 뿐, 이러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부조리함, 곧 신이 원하는 범주 안에서 시시포스가 끝없이 돌을 굴러 올리고 떨어짐을 반복하는 숙명처럼,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고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한 존재임을 말하려 한다. 그게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하긴 하다만. 그래 그럼 가볍게 살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시 생각하면 무거울 수도 있고, 너는 누구냐 물으면 나는 나야? 아니면 나는 신의 피조물이야. 선택의 여지없는, 있다면 회한과 쾌감 중 하나밖에 없는 인간일 뿐인 나는 70대 노인이 샹탈에게 너는 안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정체성마저 신에게 의지하는 존재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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